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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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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 라발은 [블랙 톰의 발라드] 서문에 '엇갈리는 심경으로 H.P. 러브크래프트에게 바친다'라고 적어놓았습니다.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을 좋아하지만, 그의 인종차별주의에는 동조할 수 없는 한 사람이자, 후배 작가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죠.
러브크래프트처럼 매독으로 인한 정신질환으로 아버지를 잃고, 사람들을 멀리 하며 방안에 처박혀서 자란, 사람을 멀리하고 군중공포증까지 가지고 있는,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고대신 - 혹은 괴물 - 에 대한 이야기를 지어내는 사람이 극단적인 백인우월주의 사상을 가지고 인종차별주의자가 되는 것은 일견 예상할 수 있는 흐름입니다. 그의 창작은 자신과 다른 것, 또는 자신의 영역 외, 즉 외계(outer)에 대한 혐오와 공포를 자양분으로 자라났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작가의 창작물과 그의 윤리적 문제를 분리시켜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러브크래프트의 경우엔 그 둘이 사실 완벽하게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 별개라기 보다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러브크래프트가 제노포비아나 레이시스트가 아니라 낯선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는 인싸에 모든 인종을 차별하지 않고 사랑하는 박애주의자였다면 그런 소설을 쓸 수 있었을까요? 그가 쓴 소설에 등장하는 바깥 세계의 괴물들이 그렇게 끔찍하고 공포스럽게 묘사될 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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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훅의 공포]는 그렇게 삐뚤어진 인종차별주의자로 악명 높았던 러브크래프트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심한 인종적 편견을 드러낸 것으로 악명 높은 소설입니다. 그리고 그의 작품 중에 특별히 평가가 높거나 잘쓴 작품도 아닙니다. 사실 저는 러브크래프트라는 작가의 '소설'에 대해서 그렇게 높게 평가하는 편은 아닙니다. 문장은 조악하며 플롯도 단선적인 편입니다. 스티븐 킹이나 에드거 앨런 포에게서 보이는 무드를 조성하는 세련된 문장이나 완급을 조절하는 플롯 등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크툴루 신화를 비롯한 세계관이 치밀하게 짜여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중에 후세 작가들이 이용하기 좋은, '오픈 소스' 역할로 기능하기에 참 좋은 작가라는 느낌이 드는 건 맞습니다. 어디선가 본듯하면서도 독특하고 신기하며, 심지어 세계관 자체가 빡빡하게 짜여있는 편이 아니라, 가져와서 얼마든지 2차 창작자의 입맛에 맞게 커스터마이징을 시킬 수도 있습니다. 나름 유명한 작가들에 의해 어느 정도 권위를 획득한 소스이기 때문에, 세계관을 끌어오는 것만으로 작품에 일정 부분 이상의 아우라를 부여할 수도 있습니다.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은, 사실 그의 작품 자체의 힘보다는 2차 창작자들의 노력에 의해 명작의 반열에 올려졌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실 크툴루 신화 역시 러브크래프트는 따로 정리한 적 없습니다. 하지만 러브크래프트는 어쨌든 후대의 수많은 후배작가들이 뛰어놀 수 있는 토지를 마련했고, 그 땅 위에 씨를 뿌리고 열매를 맺게 했습니다. 물론 본인이 수확한 작물로 만들어낸 요리는 개중 좀 뛰어난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었지만... 저는 그렇게 후대까지 남을 명작은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후에 러브크래프트가 만든 열매와 수확물로 사람들을 깜짝 깜짝 놀라게 만들 정도로 빼어난 요리를 만드는 사람들이 등장했죠. 귀여니 팬픽 중에 귀여니 소설보다 훨씬 뛰어난 작품들이 나왔듯, 지금도 러브크래프트의 소설보다 훨씬 잘 쓰여진 러브크프티안(lovecraftian) 소설들이 계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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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많은 펄프 픽션이, 영화가, 게임이 러브크래프트의 '오픈 소스'를 기반으로 탄생했고, 이것을 '문학'과 '사회학'의 영역으로 끌고 오려는 시도도 여러번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손대기 용이한 테마는 아무래도 러브크래프트의 인종차별적 성향일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베어는 [Shoggoth in Bloom]이라는 단편에서 쇼거스를 연구하는 흑인 교수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켰습니다. 그리고 이외에도 많은 작가들이 러브크래프트의 '오픈 소스'를 가지고 비슷한 짓을 하기 시작했죠.
빅터 라발의 [블랙 톰의 발라드] 역시 같은 시도를 한 러브크래프티안 소설입니다. 앞서도 말했듯 인종차별로 악명 높은 러브크래프트의 작품 중에서도 그 분야에서 탑을 찍은 작품인 [레드훅의 공포]를 탁- 찍어서 흑인 소년을 주인공으로 삼은 새로운 이야기로 탄생시킨 것이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지점을 바로 잡았을 뿐 아니라, 장면 묘사나 사건의 전개, 플롯 등 모든 부분에서 [레드훅의 공포]보다 잘쓴 소설입니다. 심지어 종종 [레드훅의 공포]의 문장들을 직접 인용하며 그 문장에 있는 인종차별적인 의미를 다르게 해석하도록 만들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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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이런 작품들을 읽고 있노라면, 인간이란 존재가 참 기괴하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방안에 처박힌 제노포비아가 지어낸 몽상 같은 기괴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기분 나빠지는 경험을 즐기고, 그것에 열광합니다. 하지만 그 제노포비아이자 고립주의자이자 백인우월주의자/문화우월주의자가 만들어낸 세계는 좋아하면서 그 근원이 된 혐오와 공포에 대해선 어쩔 수 없이 근엄하게 꾸짖으려 합니다. 그래서 역으로 그의 혐오가 만들어낸 결과물을 뒤집어, 그의 세계에서 기원했음이 분명하되 그의 세계의 근원을 뒤집는 결과물을 내놓습니다. 그래서 빅터 라발의 [블랙 톰의 발라드]는 러브크래프티안 소설이지만, 동시에 [레드훅의 공포]의 모든 요소를 뒤집어 놓습니다. 심지어 등장인물인 말론과 수댐이라는 백인 주역들을 뒤로 밀어놓고 흑인인 테스터를 전면에 내세우며, 그가 사건을 시작하고 끝내고, 살아남고, 지배하도록 만들어 놓습니다.
러브크래프티안 소설들을 이러한 컨텍스트에서 제외한 채, 하나의 텍스트만 놓고 평가하거나 판단하는 게 가능한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저는 러브크래프트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블랙톰의 발라드]를 읽고 서평을 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레드훅의 공포]를 읽고, 러브크래프트에 대해 조사를 조금 더 해야 했습니다. [레드훅의 공포]는 사실 소설만 놓고 본다면 여러 모로 형편없어 보입니다. [블랙톰의 발라드]는 확실히 잘 써낸 소설이긴 합니다. 하지만 [레드훅의 공포] 없이 존재하는 [블랙톰의 발라드]가 의미가 있나? 라는 질문에 저는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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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크래프티안 소설이라는 것은, 러브크래프트라는 '오픈 소스'를 사용해서 창작된 작품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블랙 톰의 발라드]는 단순히 그 오픈 소스를 가져오지 않고, '인종적 편견'이라는 지점을 대립축으로 하여, [레드훅의 공포]의 인종적 관계를 의도적으로 반전시킵니다. [레드훅의 공포]에선 희생자 혹은 이름없는 조력자에 불과했던 유색인종을 메인 주연의 자리에 올려 놓고, 원작의 메인 인물들이었던 수댐을 오히려 주변부의 인물로, 말론은 관찰자의 위치로 내려놓게 합니다. 이야기 내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에, 러브크래프트가 가장 혐오해 마지 않았을 교육받지 않은 유색인종 빈민을 앉혀 놓은 것이죠. 요즘 한창 이슈가 되고 있는 PC와도 조금 다릅니다. 이 작품은 균형을 잡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80년대에 유행하던 블랙 익스플로테이션의 환상문학 버전에 가깝습니다. '능력'을 얻게 된 블랙 톰은 말론과 수댐, 마애트처럼 기존의 자신을 무시하던 인물에게 자신의 능력으로 나름의 대가를 치르게 합니다. (다만 블랙 톰이 어떤 과정으로 능력을 얻게 됐는지에 대해서 왜 밝히지 않는 것인가요... 가끔 저는 이런 류의 작품들에서 보여지는 이런 모호함들이 솔직히 맘에 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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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서 나온 소재들로, 이렇게 자신의 작품에 반기를 드는 이야기를 만들어 낸 [블랙 톰의 발라드]를 러브크래프트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우린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대중들이 이 작품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쉽게 판단내릴 수 있죠. 이 작품은 영국환상문학상과 셜리 잭슨 상을 받았고, 그 외에도 수많은 환상문학상에 노미네이트 되었습니다.
* 본 리뷰는 황금가지로부터 서평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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