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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책

<바다가 들린다> - 햇빛 찬란한, 하지만 혼란스럽던 날들

by 이어원 2017. 3. 11.

     

     삶은 길고 그렇게 쉽지도 않고
     언제나 또 다른 반전
     
     - 이적, <해피 엔딩>
     


1.
     
"도쿄에  정말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욕조에서 자는 사람이야."
    
화려한  조명으로  밤에 찬란하게 빛나던 코오치 성(城), 그리고 수많은 멜로드라마에서 계속해서 인용되었던 지하철 역에서의 애절한 재회와 리카코의 허리숙인 인사를 마지막 장면으로, 지브리에서  제작한 72분 짜리 애니메이션은 끝났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이 이야기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히무라 사에코가 쓴 두 권 짜리 소설 <바다가 들린다>는 그것과는 좀 많이 다른 이야기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은 소년기의  아련한 추억과 첫사랑의 재회, 그리고 오랫동안 감춰왔던 진심과  새로운 로맨스의 시작을 알리며 마무리 한다. 하지만 히무라  사에코의 소설은 잊지 않는다. 친구와 같은 여자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자신은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여자에게 외려 무심하게  대하는 것이 의리라고 생각했었던, 순진하지만 어리석은 소년이 대학에 진학하고 여러 여자를 만나면서도 아직 성장하거나 자라지  않았음을, 아버지의 불륜에 대해 "엄마가 갑갑하다고 생각 했어.  그냥 좀 참으면 될 걸, 괜히 일을 크게 만든다고"라고 중얼대고,  필요할  때마다 남자 아이를 곤란하게 만들던 이기적인 소녀는, 거절할 줄 모르고 여자에게 끌려다니는 우유부단한 소년을  끝까지 이용하며 힘들게 할 것임을. 삶은 길고, 그렇게 쉽지도  않고, 영화처럼 그 순간의 해피 엔딩으로 모든 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2.
     
"이건 새로운 사실이었다. 난 여자애들은 원하는 걸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은 모든 걸 알고 계획이 있다고... 그런데 그들도 몰랐나 보다. 어쩌면 우리만큼 혼란스러웠는지 모른다."
     
- [Wonder Years] Season 2. Episode 5
     
3. 
     
그래, 원래 소년기의 감정이란 혼란스러운 것이다. 소녀여, 우리들은  그랬다.  하얀 피부와 너의 싱그러움을 동경하면서도 외려 낯설다는  이유로 피하려 했었고, 내 마음 저 깊은 곳에 너에 대     한 애틋한 감정이 있음을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이미 넌 내 친구가 마음에 두었다는 이유로 피하려 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알게 된 이후에는 너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저 피하고 싶어했다. 
     

소년들은  그렇다. 모든 것이 두렵고, 알 수 없는 일들은 미뤄두고  싶어하며, 확신하지 못하는 모든 것에 대해 우유부단하게 행동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너희들은 빠르게 변해간다. 어쩌면 바다 건너의 소녀들도 내가 만나고 겪은 이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을까. 우린 그렇게 혼란스러운 가운데, 너희들에게 다가갈 수 없이 "그저 의논상대로 고착되어버린" 사람이 된 적도 있고, "부르면 달려오는 남자"로 취급받은 적도 있다. 심지어는 
     
  기가 죽어있는 모습보다 째려보는 것이 리카코 답다
     
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을만큼 너희에게 조련당한 적도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너희는 끊임없이 어른이 되어갔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해서  혼돈스러웠다. 그래, 우린 너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안다고 믿었었지만, 너희 역시 혼돈스러웠을지도 모른다.
     
4.
     
그래서  그랬겠지. 나와, 대학의 선배와, 그리고 그 유부남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것도 무엇을 원하는지 몰라서였겠지. 그러면서 도  끊임없이 어른인 척 나에게는 충고하길 원했겠지. 그렇게 너는  그  남자와 그 가족에게 상처받고, 그 선배는 너에게 상처받고, 나는 또 다른 이에게 상처받고... 그런 일들이 계속 반복되고. 
     
차라리  다행인 것은, 그런 상처가 문제라면 아직까지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남아있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스무살의 소년에겐  청춘과 열정만은 남아돌 정도로 충분히 남아 있고, 우린  단 한 번의 거절도 없이, 어떠한 보답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네가  부를 때마다 달려가곤 했었다. 때로는 우리의 진실한 친구 중 한 명이 
     
  여자한테  부르면 오는 남자로 찍히면 남자 쪽이 지는 거야. 난 고등학교 때 진 이후로 아직도 만회 못 했다니까.

     
라고 충고해 주어도 말이다. 모리타키는 자랑스럽게 말하지 않았던가. 
     
  응,  부르면  달려오는 만만한 남자라고 생각한데도 말야. 이럴 때 내게 기대줘서 기뻤어.
     
라고.



     
5. 
     
그 혼돈스러운 날들, 우리에겐 충분히 낭비할 수 있는 젊음과 청춘이 있었다. 지금에서야 너에게 바친 그 날들의 댓가로 아무 것도  돌려받지 못했음이 한스럽지만 - 부탁인데 그날의 추억이니, 하는 개소리는 하지 말도록. 네가 필요한 것은 도쿄에 갈 여행자금을 빌리는 것 뿐이었지 않았나 -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차피 그  청춘은 낭비될 것 뿐이었다면, 욕할 수 있는 소녀가 등장하는 이야기 몇 개 쯤은 확실하게 얻을 수 있었지. 내 평생 기타를 잡고 노래를 만들 몇 가지 사연과. 
     
히무로  사에코의  소설에서 리카코는 "보고 싶은 사람이 도쿄에 있는데  그 남자는 욕조에서 자는 사람이야"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것을 기억하지조차 못했다. 그녀에게 그저 모리사키는 "부르면 오는 만만한 남자"였을 뿐이고, 모리사키는 두 명의 여자 사이에서 우유부단하게 오가며 그런 병신짓을 하는 혼돈스러운 소년일 뿐이었다. 
     
삶은  길고,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처럼 쉽지도 않았다. 그리고 확실한  해피엔딩도 없다. 리카코와 여전히 데이트를 하지만, 리카코는  여전히 상처받은 소녀 노릇을 하며 이기적으로 모리사키를  괴롭힐  것이다. 그리고 그 상처를 극복해내는 순간, 모리사키는 필요없게  되고 그녀는 다시 영악한 여자로 변해갈 것이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은  딱 좋은 곳에서 끝났다. 하지만 모리사키와 리카코의 삶은 계속 된다. 소설이 끝난 후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