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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책

[64] - 뒷표지에 낚이지 말 것!




1.
경찰서 내의 이야기를 리얼하게 다룬 추리소설이라면, 그 첫머리에 에드 멕베인의 '87분서 시리즈'를 연상하게 된다. FBI라는 연방수사국을 제외하면, 각 경찰조직이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미국의 경찰과 일본의 경찰조직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아무래도 요코야마 히데오의 [64]를 에드 멕베인의 소설에 비견하는 것은 곤란하겠지만, 적어도 경찰서 내의 이야기를 최대한 사실적으로 접근한다는 지점은 비슷하다. 하지만 그 둘을 완전히 다른 소설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아무래도 독특한 일본의 경찰조직이다. 

2. 

'춤추는 대수사선', '파트너', '케이조쿠'를 비롯한, 일본의 수많은 경찰 추리드라마를 즐기는 이에게라면, 전혀 낯설지 않은 단어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캐리어'라는 단어인데, 이는 한국의 행정고시에 해당하는 국가공무원시험 1종 합격자 중 경찰직에 배속되어 경부보로 임명된 사람을 가리키는 은어이다. 그들은 고속승진이 보장되고 진급에 제약이 없는 위치로, 보통 도쿄대 법학부 같은 명문대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은 반면, 현장 경험이 없는 책상물림이나 현실을 모르고 범죄수사보다 자신의 출세에만 눈이 먼 관료 같은 느낌이 강하다. (실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추리물에서 이런 모습으로 그려진다) 또한 젊은 나이에 높은 계급에 오르면서 지휘권을 가지지만, 동시에 현장경험이 많고 계급은 낮은 논캐리어들과 많은 갈등을 초래하기도 한다. (이 역시 실제로는 어떤지 모르겠고 대부분의 추리물에서 그렇게 그려진다) 

3. 

검은숲의 편집자가 정리한 이 책의 줄거리는 이렇다; "14년 전 미제로 끝난 소녀 유괴살해사건. 일명 '64'. 새로 취임한 경찰청장이 시효만료 1년을 앞둔 지금 사건을 마무리하겠다고 나서지만 유족은 청장의 방문을 거절한다. 경찰 홍보실의 미카미는 유족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64'의 담당형사들을 찾아가고, 사건 후 퇴직하거나 은둔형 외톨이가 된 동료를 보면서 그들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음을 직감한다. 그러던 중 '64'를 모방한 유괴사건이 일어나는데......"

이 글만 놓고 보면, 독자는 당연히 '64'가 14년의 간격을 두고 일어나는 두 개의 유괴사건의 범인을 잡는 추리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처음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물론 최종적으로는 두 사건의 범인은 밝혀지지만, 추리물의 방식은 아니다. 조금 과장되게 이야기하자면, 그 두 유괴사건은 이 소설에서 아주 중요한 소재이기는 하지만, 핵심적인 내용은 아니기 때문이다. 

4.

요코야마 히데오의 '64'는 689페이지에서 끝난다. 초반에 주인공이자 화자 역할을 하는 미카미의 이야기가 세팅되고, 14년 전 벌어진 유괴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80페이지 언저리에서 나온다. 자 이제 줄거리 소개에 따르면 64에 대해 사람들이 비밀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밝혀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사실은 300페이지 근처에 가서 밝혀진다. 줄거리 소개에 따르면 64를 모방한 유괴사건이 바로 벌어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500페이지가 넘어서야 벌어진다. 그런데 놀랍게도 채 100페이지가 되지 않아서 범인이 밝혀지고, 이야기가 정리된다. 심지어 탐정의 추리도, 범인이 밝혀지는 과정도 거의 없다! 

당연히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오른다; 도대체 두 개의 유괴사건 없이 이 책의 남은 내용 - 그러니까 64가 첫 소개되는 80페이지부터 두 번째 모방 유괴사건이 일어나는 4백 페이지 넘는 공간 - 은 어떻게 채워진 것인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 중간에 담겨진 내용은 두 개의 유괴 사건보다 훨씬 더 재밌고 흥미진진하다. 

5. 

요코야마 히데오는 지방경찰서 내의 캐리어와 논캐리어 간의 갈등, 본청과 지방경찰 간의 조직에서 발생하는 갈등, 또한 경찰과 언론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경찰서를 배경으로 한 [하얀 거탑]을 그려낸다. [64] 내에 등장하는 경찰들은 유괴범과 두뇌싸움을 벌이는 것이 아니다. 경무부와 형사부가 서로의 배에 칼을 하나씩 삼켜두고 두뇌싸움을 벌이고, 경찰 홍보부와 지방지 기자들이 음모와 배신으로 반목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엎치락 뒷치락 하는 사건의 전개는 사건을 추리하는 재미보다 훨씬 더 흥미진진하다. 형사부에서 밀려나 홍보부에 자리잡은 주인공이자 화자인 미카미를 비롯한 홍보부의 인물들, 경무부의 간부들, 형사부의 형사들, 기자들까지 모든 캐릭터가 살아있고, 그들이 부딪치는 모습에 넋을 잃고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64의 범인이 궁금하다는 사실조차 잊게 될 때가 있는 것이다.

500페이지가 넘어서야 '겨우' 64를 모방한 유괴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이쯤 되면 독자 역시 소설 내내 기자와 경무부와 형사부에 치이며 완전히 지쳐버린 미카미의 심정과 다를 바가 없다. 이미 빠져나갈 길은 없어 보이는데, 책은 200페이지가 채 남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끝내지? 어떻게 끝내지? 하며 미친 듯이 책장을 넘기고 나면 약간은 허무한 요코야마 히데오의 결말과 만나게 되는데, 다소 그곳에서 실망할 수는 있겠지만, 뭐 그 정도쯤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재밌게 600페이지 이상을 읽고 난 후다. 

6. 

물론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의도적으로 독자를 속여넘기는 출판사의 상술이 괘씸하긴 하다. 그리고 가끔은 홍보 담당자나 편집자들은 책 내용에서 가져왔으면서도, 전혀 다른 이야기를 어쩜 이렇게 그럴 듯하고 보고 싶게 편집해서 보도자료나 띠지, 뒷표지에 써넣는지 궁금할 정도로 신기하다. 그러므로 표지나 책소개에 속아서 2개의 유괴사건에 얽힌 치열한 두뇌싸움과 감춰진 비밀을 기대하고 이 책을 쥔 독자는 조금 실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정보를 알고 본다면, 작가의 성실한 취재와 노력으로 만들어 낸 이야기에 푹 빠질 수 있다. 그러니까 한 가지만 주의하자. 이 소설은 두 개의 유괴 사건의 연관성을 파고 드는 정통 추리물이 아니라 경찰판 [하얀 거탑]이다. 뒷표지의 줄거리 소개에 낚이지 말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