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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영화

<엔더스 게임> - 우주라는 이름의 하이스쿨

by 이어원 2017. 4. 1.


1. 


<은하영웅전설>을 다시 읽다가, 문득 <엔더스 게임>이 보고 싶어져서 찾아 보았습니다. 둘 다 우주 함대를 지휘하는 젊은 - 혹은 어린 - 천재 전략가 사령관의 활약을 그린 작품들이죠. 그리고 둘 다 처음엔 라이트 노벨 혹은 영 어덜트 노벨이라는 비슷한 타입의 텍스트 컨텐츠로 시작했구요. 그래서 그런지, 어린 시절에 <은하영웅전설>을 볼 땐 양 웬리가 대단하고 천재적인 용병가인 것처럼 보였는데, 나이 들어서 읽어보니 사실 그가 만들어 낸 전략은 별 것 아니고, 엄청난 운빨이 뒤따른 것에 지나지 않더군요. 요즘 친구들 말로 하자면 "작가 버프/주인공 버프 쩌는" 사건들이었죠. 10대 후반엔 엄청난 마법처럼 보였던 이제르론 함락을 지금 읽어보면,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돼"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입니다. 


2.


<엔더스 게임>의 초반도 마찬가지입니다. 해리슨 포드는 계속해서 "천재적인 전략가"라고 감탄하지만, 막상 보이는 것은 그닥 대단하지 않죠. 사실 엔더가 계속해서 하는 '게임'의 규칙을 관객에게 보여주고 숙지하는 것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략'이라는 개념을 관객에게 이해시키려고 하는 것도 무리구요. 그래서 영화는 계속 해리슨 포드의 입을 빌려 관객들을 설득하려 합니다. "천재적인 재능이야" "저건 천재적인 전략이야." 몇 번이고 얘기하지만, 막상 설득 되진 않죠. 


보통은 문자로 되어 있는 장면을 시각화 했을 때 쾌감이 커지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소설들이 텔레비전 쇼로, 혹은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인데 <엔더스 게임>의 영화버전을 먼저 보는 체험은 종종 반대의 효과를 기대하게 합니다. 지금의 이 장면을 문자로 읽었을 때 얼마나 심리적 쾌감이 커질 것인가, 를 상상해 보게 하는 것이죠. 영화에서는 간략하고 성기게 정리되어 있는 엔더의 인간적 압박감, 그것이 기발한 전략적 승리를 통해 해소되고 극복되는 과정을 보여주려면, 당연히 문자를 통해 자세하게 사건과 각 인물의 심리를 묘사해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엔더스 게임>의 영상화 과정에선 그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리고 오직 우스꽝스러운 진(포메이션)의 모양만이 남아있죠. 아사 버터필드의 훌륭한 연기가, 지금의 상황이 텍스트 상태였을 때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지를 어렴풋이 짐작하게 합니다만, 사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3. 


배경을 우주 공간으로 옮겼을 뿐, 기존의 영어덜트 성공작들에게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여전히 틴에이저가 등장하며, 여전히 그들이 팀을 이뤄서 서로 경쟁하다가 공동의 적을 만나 협력하고 대항합니다. 일본의 틴에이저들은 거대 로봇에 탑승하여 지구를 지켰지만, 미국의 틴에이저들은 서로를 죽이는 텔레비전 쇼에 출연하기도 하고, 알 수 없는 미로에서 달리기도 하고, 마침내 우주 함대에서 독특한 게임을 하며 성장해가기 시작했습니다. 명목 상으론 지구에 침공한 외계인과의 전투를 그리고 있습니다만 - 이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대부분의 내용은 '훈련'을 빙자한 '이게 외계인과의 싸움에 도움이 되나' 수준의 퍼즐 게임입니다. 하나의 게임을 마치고 나면, 다음 스테이지가 나타나고, 규칙이 약간 다른 다음 스테이지를 깨고 나면 최후의 스테이지가 펼쳐집니다. 말 그대로 '엔더의 게임'이며, 그 게임의 최종장이 그대로 단 한 번 뿐인 전투가 됩니다. 그리고 이후엔 사족으로 붙기엔 너무 길고 재미없는 에필로그가 기다리고 있죠.


역시 텍스트라면 상관 없습니다. 아직 원작을 읽어보진 않았습니다만, 책은 게임의 마지막 스테이지를 영화보다 훨씬 박진감 넘치게 묘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럴 수 없죠. 영화에서 마지막 스테이지를 지휘하는 엔더의 모습을 보는 것은 굉장히 맥빠지는 일입니다. 연출이 게으른 탓에 이 영화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전형적인 안티클라이맥스의 구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최후의 승리는 또 얼마나 맥 빠집니까. 역시 텍스트였다면 엔더의 심리적 절망감과 압박을 거대한 갈등처럼 표현할 수 있었겠습니다만, 영화에선 이 모든 게 철저하게 실패했습니다. 스펙터클한 우주전쟁도 없었고, 하나의 행성을 파괴하는 '데스 스타'스러운 시각적 쾌감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무너지는 주인공의 절망감이 제대로 표현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쓸데없이 해피 엔딩을 만들기 위해 길고 허무한 에필로그를 덧붙입니다. 


4. 


사실 주된 갈등은 인류-외계인에게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게임을 통과하는 동안 엔더도 다른 모든 이들처럼 똑같은 통과의례를 겪습니다. 미국아이들이 어른이 되면서 겪는 '하이스쿨의 정치학'을 통과해서 성숙한 어른이 되는 것이죠. 한국에 일진이 있다면, 미국에도 비슷한 친구들이 있습니다. 모든 영화에서 보여지는 하이스쿨 정치학의 모습은 비슷합니다. 쿼터백과 치어리더는 데이트를 하며, 힘이 센 아이는 항상 힘이 약해 보이는 아이를 샤워실이나 화장실에서 폭행합니다. 폭행하는 아이의 좌측과 우측에는 레프트 윙, 라이트 윙처럼 호위부대가 붙어있습니다. 주인공은 힘이 약한 너드입니다만, 항상 그 힘센 아이들과 맞서 싸우고, 그를 위로해주고 도와주는 작은 소녀가 있죠. 힘센 아이들에게 따돌림 당하면 밥을 혼자 먹습니다. <퀸카로 살아남는 법>의 그 세계와 원리입니다. <헝거 게임>은 이것을 뒤집었고, <메이즈 러너>는 살짝 비틀었습니다. <엔더스 게임>은 그러진 않습니다. 배경만 우주 공간으로 가져왔을 뿐 거의 정석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죠. 저는 다른 모든 영 어덜트 노벨들처럼 아마 원작에선 이러한 갈등과 인간관계가 성실하고 자세하게 표현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이 스토리를 지탱하는 메인 플롯이라는 건 해리슨 포드의 대사만 들어도 알 수 있죠. 그는 초반에 "재능 뿐 아니라 리더십"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이것은 천재적인 능력을 지닌 너드가 어떻게 하이스쿨의 정치학 속에서 주변인물들 위에 올라설 수 있는가를 대리만족 시켜주는 쾌감을 선사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아마도 이러한 부분들이 영어덜트 소설에 머리를 박고 사는 미국 너드들의 환호를 얻어낸 지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설정에 거부감을 느낄 하이스쿨의 '잘 나가는 틴에이저들'은 절대로 이런 책을 읽지 않겠죠. 영 어덜트 노벨이긴 하지만 이건 무려 Sci-Fi를 표방하고 있으니가요. 


<해리포터>의 퀴디치가 축구를 연상시킨다면, <엔더스 게임>에서 엔더와 소대원들이 하는 전투장에서의 게임은 평면이 아니라 3차원으로 확장된 아메리칸 풋볼 같습니다. "몇 명이 부상을 당하든 상대방의 문으로 들어가면 승리"라는 룰부터 딱 보면 터치 다운과 비슷하죠. 아무리 생각해도 벌레 모양의 외계인들과 싸우는데 이 게임이 왜 필요한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그들과 육체적으로 싸우는 보병도 아니고, 유인 전투기도 아닌 드론과 포를 사용해서 싸우는 전투원들인데 말이죠. 이유는 없습니다. 그냥 작가의 의도는 우주라는 하이스쿨에서 천재적인 너드 한 명이 전략을 사용해 쿼터백을 때려눕히고 치어리더와 데이트하는 승리의 쾌감을, 자기 책을 읽고 있는 다른 너드들에게 전해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것도 심지어 3D 풋볼이라는 엄청 쿨한 공간에서 말이죠. 


5. 


미국 문화와 감성을 가지고 만들어낸 로컬스러운 영화가 한국에 수입되어 들어오면서 마케팅적인 이유로 장르적인 특성이 쓸데없이 부풀려지고,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이 전혀 다른 종류의 영화를 기대하며 감상에 임하게 되는 실수가, 이 영화에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포스터'와 '트레일러'로 관객들을 '낚는' 행위인데요. <엔더스 게임>의 포스터만 보면, 우주공간에서 벌어지는 인간 vs. 외계인의 '지구운명을 건' 대규모 공중전이 나오는 <스타워즈>스러운 영화를 연상하게 됩니다. "지구의 운명을 건 최후의 반격"이라는 카피는, 영화를 보고 나면 실소마저 자아내게 합니다. 사실상 영화는 지구인의 일방적인 학살로 끝나죠. 영화 내에서 지구의 운명이 위기에 빠진 건 50년 전의 일이고, 그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위협받은 적조차 없었습니다. 하지만 속아넘어가도 어쩔 수 없간 하죠. 그렇게 낚이라고 만드는 건데요. 문제는 그런 영화를 기대하고 온 사람들이 보게 되는 건 영화 내내 빼빼마른 틴에이저들이 텅 빈 공간에서 3D 풋볼이나 하고 있는 장면이라는 것이죠. 당연히 만족스러운 감상을 할 수 있을 리 없습니다. 


6. 


영화와는 별개로, 요즘 들어 점점 더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는 사람들의 평균 연령이 현저하게 낮아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어쨌든 20대 중반이 넘어야 첫 번째 앨범을 발매하고 가수가 될 수 있었는데, <고등래퍼> 같은 걸 보면 이미 10대 초중반의 학생들이  일정 수준 이상의 랩스킬을 갖고 작업물을 내놓고 있죠. <프로듀스 101>을 보면 어리게만 보이는 소녀들도 엄청난 심리적 압박감과 경쟁과 싸우고 있구요. 오히려 물러터진 어른들보다 훨씬 강한 친구들이 많이 보이는 걸 보니, 실제로 외계인과 싸우는 날이 오면 지구를 지키는 친구들의 평균 연령도 영화처럼 많이 낮아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인류의 역사에서 10대의 어린 친구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동과 소년병을 금지하고 그들을 학교에만 가둬놓기 시작한 것 자체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이젠 오히려 그들이 스스로 보호라는 울타리를 뛰어넘어 세상에 나오기 시작하고 있네요. 조만간 이런 현상에 대해서도 쓸데없는 농담 같은 글을 하나 써볼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