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작된 도시>는 거짓말처럼, 음모론 망상증 기크 판타지를 좋아하는 저같은 사람의 입맛에 딱 맞춘 영화입니다. 인물이나 이야기는 현실에서 살짝 - 이라기엔 조금 많이 - 위로 떠 있고, 솔직히 개연성도 많이 부족한 막 나가는 이야기지만, 적어도 자신의 장르 안에서 이해되는 수준으로 신나게 휘저으며 놀고 있죠. 진짜 아무 기대 없이 봤는데 굉장히 재밌었습니다. 물론 이게 취향에 안 맞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 같긴 합니다. 가끔 이런 영화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대한민국도 땅도 좀 넓고 인구가 좀 많아서,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들만 이 영화를 봐줘도 먹고 살 수 있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았을텐데... 국내에선 대다수가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죠.
영화보다는 요즘 친구들이 좋아하는 웹툰에 어울리는 이야기이고, 상상력입니다. (만화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전형적인 만화적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구성과 장면들이 눈에 띄구요. 인물들 역시 만화적 전형성을 십분 활용한 캐릭터입니다. 물론 비슷하게 만화적인 구성이지만 <검사외전>처럼 시침 뚝 떼고 리얼리즘인 척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작된 도시>는 얌전 떨지 않습니다. 애초부터 지향했던 지점대로 우직하게 달려갑니다. 저는 그래서 좋았습니다.
2.
박광현 감독이 오랜 시간동안 <권법>을 준비하다 몇 번이나 엎어지고, 새로 들어가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그러므로 몇몇 장면엔 <권법>에 쓰려다 못 쓴 것 같은 아이디어들이 녹아 있습니다. 커머셜 감독 출신답게 컷과 컷 연결이 대담하고 눈에 띄는 독특한 컷과 편집을 보여줍니다. 대신 자기가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들을 과감하게 건너뛰고 호쾌하게 달려가는데, 어느 순간 그게 설명이 성기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잡혀있던 동료들을 구출하는 장면 같은 게 그 예입니다. 모두 천장 위에 매달려 결박되어 있었는데, 급습하는 장면 이후 바로 동료들이 자유롭게 풀려서 건물 밖으로 나옵니다. 구차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정상적인 편집은 어쨌든 동료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풀어주는 것을 설명해야 합니다. 맨손으로 뛰어든 주인공이 그렇게 빠른 시간동안 쇠사슬에 결박된 사람 넷을 그렇게 간단하게 풀어주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해 보입니다. 물론 리얼리즘에서 벗어나 있으니까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다쳐도 모든 문제들이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 버리니까 갈등 자체가 형성되지 않고 계속 달리는 스피디한 감각 속에 줄거리 자체가 침몰되어 버리는 면이 좀 있습니다.
3.
사건은 굉장히 빠릅니다. 어차피 흔한 이야기니까 망설일 필요도 없습니다. 시작하자마자 영화는 계속해서 내달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빼면 좋을 것 같은 장면이 몇 있습니다. 이를테면 초반에 나왔던 어머니의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아니, 어머니의 이야기는 어느 정도 한국적인 정서에 맞으니 살린다고 하더라도 감옥에서 환상으로 나타나는 장면 하나만큼은 꼭 들어냈어야 했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구린 장면 중 하나입니다.
오종세의 캐릭터는 발상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소시민인 척 하는 악당의 아이디어는 괜찮지만, 그걸 표현해 내는 방식이 너무 구립니다. 두 가지 모습이 혼재되어 있긴 하지만, 때에 따라서 그걸 구분해 주었어야 합니다. 만화적인 캐릭터이긴 한데 배우가 표현해 내는 것에 약간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동성애적인 요소를 끔찍한 고문으로 처리했다가, 마지막에 수준 낮은 농담으로 에필로그에 등장시킨 건, 정말 좋지 않은 선택이었습니다. 처음의 의도는 끔찍하지도 않고 불편했으며, 또 다시 등장했을 땐 웃기지도 않고 불쾌했습니다. 보통은 들어내야 할 장면을 그냥 넣어두더라도 그닥 크게 안 거슬리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영화의 경우엔 "저걸 왜 그대로 뒀지?" 수준의 장면들이 몇 개 있었습니다.
4.
영화의 최종 각본가는 박광현 감독 본인으로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크레딧을 살펴보면 각본가와 각색자가 더 붙어있죠. 원래의 시나리오를 본인이 쓰진 않았을 것이고, 제 생각에는 원안은 조금 더 하드하고 리얼리즘적인 이야기였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감독이 바꾸는 과정에 서 자신의 취향과 장점에 맞춰 뜯어고친 부분이 좀 있겠죠. 이를테면 중간에 주인공이 악당에게 작게 한 방 먹이는 시퀀스가 있는데, 제 생각엔 이 시퀀스는 조금 더 정밀하고 치열하게 그려질 필요가 있는 스릴러적인 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박광현 감독은 이걸 하나의 해프닝처럼 빠르게 돌파해버리고 바로 카체이싱으로 넘어갑니다. 계략을 짜고 그것을 스릴러처럼 구성해내는 건 자기 장기가 아니라고 생각한 건지, 하기 싫었던 건지 모르지만 꽤 긴장감 넘치게 짜낼 수 있고, 나름 작은 카타르시스를 줄 수도 있는, 심지어 결말을 그 지점에 갖다 놓을 수도 있는 사건을 너무 간단하게 넘어가 버리죠. 그러니까 오히려 클라이맥스는 더 약하게 느껴집니다. 액션은 많이 터지지만, 카타르시스는 약하고 후반부로 갈수록 책임질 수 없는 크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되어 버리죠.
중간 중간 초창기의 타란티노나 그 스타일을 이어받은 90년대~2000년대 초의 미국 인디 영화들에서 보이는 유머들이 있습니다. 김상호가 볼펜 새총을 쏘거나 총을 쏘는 장면은 너무나 유명한 <펄프 픽션>의 오마주입니다. 저는 좋아서 환장하는 유머지만, 요즘 친구들은 촌스럽다고 생각하거나 저게 뭐냐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잘 모르는 부분이죠.
5.
좋은 각본가를 구하면 해결되는 문제일까, 라고 생각하면 그도 아닐 것 같습니다. 박광현 감독은 자기 자신 나름대로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작품을 만든 것입니다. 원래 각본이 어떠했듯, 박광현 감독은 그 아이디어를 가져와서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원안을 쓴 사람은 분노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이런 걸 좋아하는 취향이 분명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한국에 턱없이 적다는 게 문제죠. 헐리우드 스튜디오에서 B급 취향에 맞춰 틴에이지 배우들을 등장시킨 뒤, 적당한 예산으로 만들어서 팔았으면 꽤 신나게 즐길 수 있는 볼거리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영화판엔 틈새시장이란 게 없으며, 틈새시장을 노릴 거면 이 정도의 예산을 쓰면 안 되죠.
배우들도 애매합니다. 주연급의 지창욱은 요즘 라이징 스타라고는 하는데, 인지도나 지명도는 그렇게 높아보이지 않습니다. (저같은 아저씨들은 잘 모릅니다) 심은경은 몇몇 작품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기는 했습니다만, 저에게는 애초에 실링이 그리 높아보이는 배우는 아닙니다. <써니>나 <수상한 그녀>는 좋은 기획 - 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저 중의 한 작품은 대놓고 <빅>의 우라까이인데 - 이 살려 놓은 작품이었고, <써니>에서는 오히려 강소라나 천우희가, <수상한 그녀>에서는 몇 초 나오지도 않은 김수현이 더 기억에 남았었죠. 저는 이 영화 뿐 아니라 어디에서도 오정세의 연기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별로 해본 적이 없으며, 이하늬는 인지도에 비해 너무 눈에 안 띄는 역할을 하다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김상호. 역할을 못한 것은 아닌데, 저런 악역에 어울리는가, 라는 질문엔 잘 모르겠네요, 라고 답할 수밖에 없네요. 가지고 있던 이미지를 뒤집을 정도는 안 되었던 것 같습니다.
6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좋았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이야기와 스타일이면서 지금의 한국 영화에선 쉽게 찾아보기 힘든 영화니까요. 하지만 보면서 헛웃음이 터져나온 사람이 여럿 있을 거라는 생각은 물론 했습니다. 요즘엔 예전처럼 헐리우드 영화들이 마구 수입되는 편도 아니어서, 종종 넷플릭스에 들어가 예전의 저런 스타일 영화들을 찾아보곤 합니다. 그러고보니 넷플릭스 같은 플랫폼이 저런 B급 스타일의 어떤 대안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제작비나 펀딩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고, 동시에 자막 작업만 끝나면 취향에 맞는 사람들에게 전세계적으로 배급될 수 있으니까요. 어쨌든 <웰컴 투 동막골> 때도 그랬지만, 90년대에 왕가위와 타란티노의 세례를 듬뿍 받았고, 무국적의 세계에서 한국어로 된 무국적의 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또다른 최신작을 보아서 기쁩니다. 넷플릭스든 뭐든, 그들이 살아 남아서 이런 영화를 계속 만들며 '이 땅의 다양성'에 이바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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