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터넷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절,<깔깔깔 소유머 選集>쯤에서 보았던 이야기 한 토막;
어린 아들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빠, 정치가 뭐에요?"
"음... 우리 가족을 예로 들어볼까? 아빠는 돈을 벌어오니까 아빠를 자본가라고 하자. 엄마는 집에서 돈을 관리하니까 정부라고 할 수 있겠지. 엄마와 아빠는 너를 위해 봉사하니까, 네가 바로 국민이지. 우리 집에서 일을 해주는 정부는 노동자라고 할 수 있겠구나. 아직 기저귀를 차고 있는 네 동생은 우리의 미래라고 할 수 있겠지."
아들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우선은 그 정도만 이해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날 밤, 아들은 기저귀에 실례를 한 동생이 너무 큰 소리로 울어대는바람에 그만 잠에서 깨고 말았다. 아들은 안방 문을 두드렸지만, 엄마는 너무 깊은 잠에 빠진 나머지 아들이 문을 두드려도 잠에서 깨지 않았다.
아들을 할 수 없이 가정부의 방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 방에선 아버지와 가정부가 격렬하게 섹스를 하고 있었고, 아들이 그 방을 찾아온지도 몰랐다. 아들은 할 수 없이 자기 방으로 돌아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아침,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었다.
"아들아, 정치가 무엇인지 좀 생각을 해보았니?"
"네. 정치란, 자본주의가 노동자를 농락하는 동안 정부는 계속 잠만 자고 있고, 국민은 무시당하고, 미래는 똥으로 뒤범벅 되는 거에요."
2.
김기영의<하녀>는 1960년대 '중산층의 발생'을 다루고 있다. 원작에서 김진규는 결코 거대한 부유층의 사람이 아니며, 거대 지주의 아들도 아니다. 중산층이란 계급이 발생하면서, 부유층이 아닌 계층에도 하녀(사실은 식모의 역할이다)를 두는 집안이 늘어났다. 그런데 이 '하녀'의 역할은 기존 거대 지주의 집에 있던 하녀와는 좀 달랐다. 도시화와 더불어 핵가족화가 진행되면서, 기껏해야 3-4명으로 구성된 가정에 하녀를 들인다는 행위는 수십 명의 가족이 있는 집에 하녀를 들이는 행위와는 확실히 다른 무게를 지닌다. 그녀는 혈연으로 이어진 친밀한 가족 사이에 들어선 타자이며, 필요에 의해 끌어들여진 틈입자다. 가족에게 필요성에 의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욕망과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인간이기도 하였고, 거기에 '성적 매력'이라는 무기를 획득하는 순간, 마찬가지로 성적인 결합으로 탄생한 핵가족에 위협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김기영의<하녀>는 그 순간을 에로틱한 스릴러의 문법으로 포착했다.
3.
임상수의 방식은 좀 다르다. 그는 '재벌'로 표현되는 거대한 부유층을 끌어들인다. 그리고 오프닝에서 일하는 여자/일하지 않는 여자 혹은 성적 능력을 갖춘 여자/성적으로 거세된 여자의 대비를 보여주며, 이 이야기가 성과 계급의 이야기가 될 것이라는 것을 선언한다. 그는<그때 그 사람들>의 오프닝에서도 "여자들이 권력자의 환락을 위하여 바쳐지는 지상"과 "그 권력자에게 대항하는 자들을 핍박하는 지하"를 대비시키며 "박정희의 제국"이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를 우화적으로 보여준 적이 있다. 역으로<하녀>는 실제의 장항동의 현실에서 성과 계급의 대비를 보여주며, 비현실적인 저택이라는 권력구조의 우화 속으로 들어간다.
4.
부와 권력의 지배자 훈이, 그의 거대한 제국을 승계할 후계자 나미, 그리고 명목 상으로는 같은 지배자 계급인 듯 굴지만, 기실은 외부에서 들어와 똑같이 그 권력과 부에 헌신하고 있을 뿐인 해라, 그리고 굴종에 이미 길들여진 노동자 병식과 아직은 권력관계에 순진한 노동자 은이. <하녀>의 인물구조도는 에누리 한 치 없이 지금 이 사회의 계급구조와 딱 맞아 떨어진다.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능욕당하지만, 정작 능욕인지도 모른 채 소시민의 행복을 꿈꾼다. 하지만 자본가는 그런 소시민의 행복을 이용하기 보다, 마지막 남은 위험요소까지 제거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제거는 절대 권력자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협조하는 자들의 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5.
이 영화에 등장하는 남성 캐릭터는? 오로지 훈이 한 명이다. 그에게선 윤리 감각이란 게 거세되어 있다. 그러므로 임상수의 말처럼 "그도 괴물이다" 그는 불륜을 들키고도 절대 사죄하지 않는다. 그에게 그것은 죄가 아니다. 대신 그는 이야기한다. "당신 딸이 낳아야 내 아이인 것 같습니까?" "어떻게 내 아이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습니까?" 즉 그는 권력과 부의 정점이다. 그리고 나머지 여자들은 그에게 봉사하는 자들인데, 봉사하는 방법은 둘 중 하나다. 병식과 은이처럼 노동력으로 봉사하거나, 해라처럼 성적으로 봉사하거나.
해라는 자신이 대단한 권력자라고 생각하지만, 기실은 성적으로 봉사하는 매춘하는 자다. 그러므로 그녀는 훈이의 부정에 아무소리도 하지 못하고, 대신 다른 성적인 위협인 은이의 아기를 제거하는 데만 열중한다. 원작<하녀>에서 성적 매력을 갖춘 것은 하녀였다. 위협하는 괴물 또한 그녀였었다. 하지만 임상수의<하녀>에서는 아니다. 괴물은 훈이와 해라와 그녀의 어머니다.
훈이가 출장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그에게 봉사하는 남은 이들이 음모를 꾸민다. 은이를 2층에서 떨어뜨리고, 그녀에게 약을 먹이고, 폭행을 기도하는 모습은 모조리 괴물의 그것이다. 그리고 모든 일의 원흉이고 시작인 훈은 그곳에 없다. 원래 그런 것이다.
6.
그리하여 그런 괴물들에게 노동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임상수는 거기에 두 가지의 80년대적인 장치를 끌어들인다. 병식이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는 '아더메치', 즉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해도 참는다'는 말은, 지금은 잊혀진,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에 쓰이던 80년대의 유행어이다. (물론 현재의 대한민국 사회가 80년대까지 후퇴한 탓도 있겠지만) 병식은 그런 80년대의 방식으로 이 끔찍한 구조를 '견디어' 낸다. 그러면서 보너스도 받고, 수고비도 받고, 때론 은이의 임신을 밀고도 하며 이 체제의 유지에 기여한다. 그리고 마침내 검사 아들을 키워내며 어느 정도의 신분 상승을 이뤄낸다.
하지만 은이는? 은이에겐 그런 욕망이 없다. 그녀는 백치처럼 해맑고 단순히 "세상이 나에게 불친절"하며, 내게 친절하고, 나를 존중해 줄 존재를 원한다. 그것은 아기이다. 하지만 그런 욕망을 지배층은 '위험하고 위협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그것을 비열한 방식으로 제거한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어차피 그들을 무너뜨릴 현실적인 방법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은이는 "찍소리라도 내보는 것"을 현실적인 방식으로 택한다. 그녀는 모든 노동자들이 그렇듯이 "찍소리"를 내기 위해 그들의 앞에서 전시적인 분신(焚身)을 택한다.
7.
<하녀>의 라스트 씬은 진정으로 그로테스크 하다. 그런 일을 겪었지만, 훈이의 가족은 변함없이 평온하다. 그들은 더 좋은 집으로 이사 했고, 하녀의 수도 늘었다.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한국인인데 영어로 이야기 한다. 10살도 되지 않은 어린 아이의 생일 선물로 수억짜리 그림을 준다. 젊은 어머니는 넋나간 듯 마이크를 잡고 "해피 버스 데이~"를 부른다. 그리고 생일을 맞은 나미의 시선은 아무 것도 없는 옆의 허공을 향한다.
그 허공에 무엇이 있었을까. 임상수 감독은<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은이의 자살의 마지막이 나미를 괴물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어린 아이는 자신의 유년기에 분신 자살하는 노동자를 보았다. 그리고 그 아이는 그 엄청난 권력과 부를 승계한다. 하지만 그 생일파티 자리에서도 자살한 노동자의 악령은 항상 그 아이와 함께 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 마지막 장면에서 힐끔 오른쪽의 허공을 쳐다보는 나미의 시선은 은이의 악령을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유치하겠지만, 난 거기에 전도연이, 두 눈을 부릅뜨고 나무에 매달려 있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아이는 분명히 괴물이 되었을 것이다 - 악령이 어떻게 그 아이를 키웠을지는 모르겠지만, 끊임없이 부가 부를 재생산 하는 동안 그 아이의 맘 속에서 악령도 자라났을 것이다. 그것은 두려움으로 그 아이를 망칠 수도 있고, 또는 불안으로 그 아이를 망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부와 권력과 함께 그 아이가 물려받은 죄라는 이름의 선대의 유산이다. 부가 부를 키워가듯, 죄도 죄를 키워가고, 그 모든 것이 합쳐져 재벌이라는, 권력자라는 괴물을 만들 것이다. 임상수는 그 모든 것을 함축적인 라스트 씬으로 보여준다.
8.
연세대학교 사회학 학사 출신인 임상수는, 이렇듯 김기영의<하녀>라는, 한국 영화계의 빛나는 유산인 에로틱 스릴러를 리메이크하면서, 그가 이룬 장르적인 성취를 기리기 보다는, 그냥 자신의 욕심껏 영화를 만들어 냈다. 이 영화가 나쁜 것은 아니다. 뜻하는 바도 알겠고, 나름 정성껏 웰메이드로 잘 만들어 낸 것도 알 것 같다. 근데 구태여 김기영의<하녀>라는 컨텍스트를 가져와서 그럴 일은 아닐 것 같다. 이 정도는 그 이름을 불러내지 않아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불만이 있다면 그것이다. 최소한 그 이름을 불러내서 뭔가를 하려면, 그 이름에서 뭔가 의미를 찾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건 그냥 임상수의 영화이다. 그리고 그나마 이 영화가 만들어졌을 때만 해도 임상수의 영화라는 것은 나름 의미가 있었다. 그가 <나의 절친 악당들>
같은 영화를 만들고 난 이후엔 그마저도 사라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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