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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영화

<싱글라이더>에 대한 몇 가지 잡담

by 이어원 2017. 3. 17.


1.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고은, <그 꽃>


2. 


<싱글라이더>는 단순하고 정직한 영화입니다. 에피그라프로 사용하는 고은의 시 속에 모든 내용과 주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반전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고, 조금 더 복잡한 트릭을 사용하거나, 아예 설정을 조금 어긋나게 해서 관객들을 속일만 하기도 한데, 그러지 않습니다. 반전은 충격을 주는 용도라기보다는, 주인공의 감정을 더 깊어보이게 하기 위한 장치로 보입니다. 


내용과 그 안의 상징도 잔재주를 쓰지 않고 직설적으로 내달립니다. 재훈은 더 많은 연봉, 더 높은 자리를 위해 뒤돌아보지 않고 내달렸던 인생이고, 그렇게 달린 인생의 대부분이 마주하게 되는 결말과 맞닥뜨립니다. 자신은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한 방식은, 결국 남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지옥의 입구였고, 그는 수많은 인생을 아래로 끌어내리고는 자기 역시 함께 떨어집니다. 가족까지 소홀히 하며 달려왔던 그 길의 끝엔 커다란 암흑이 있었고, 그는 끌어내려지면서, 올라갈 때는 보지 못했던 그 꽃을 찾아 떠납니다. 


3. 


좋은 이야기이며 연출은 안정되어 있습니다. 호주의 풍광을 담아낸 화면이나 이병헌의 연기도 훌륭합니다. 하지만 톡톡 튀는 역할에 잘 어울리는 공효진을 꼭 저런 역할에 캐스팅해야 했는가, 기존보다는 확실히 안정적이지만 가장 중요한 장면에서 역시 비틀대는 안소희의 연기를 보며 꼭 저런 캐스팅을 했어야 하는가, 라는 의구심이 들긴 합니다.


호주라는 배경 때문에 제작비가 늘어났고, 그렇기 때문에 스타급 배우들이 붙어야 펀딩이 가능했기 때문에 한 선택이었겠지만, 조금 더 작은 예산으로 조금 더 충실한 연기자들을 데리고 만들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물론 지금의 연기자들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스타급 연기자들에게는 어쩔 수 없이 남아있는 그들만의 이미지라는 게 있습니다. 이병헌 정도면 그것을 충분히 지워버리면서 연기가 가능한데, 공효진이나 안소희는 아직 공효진이나 안소희가 보입니다. 그게 더 좋아보이는 영화가 있는데, 평범한 한 가족을 연기해야 하는 이런 영화에서는 그렇게 적절한 선택은 아닌 것 같아서요. 


4. 


약간 시대를 잘못 타고 만들어진 느낌도 있습니다. 이제 한국 관객은 더 이상 이런 이야기를 극장에서 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텔레비전 단막극 드라마로 만들어졌으면 꽤 인상적인 작품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짧은 러닝타임인데, 그것마저 채우기에 사건이 좀 부족해 보입니다. 물론 호주의 풍광과 재훈의 감정 위주로 흘러가는 드라마라 그 편을 더 폭넓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은데, 재훈이 자신의 상황을 납득하게 되는 과정이 그렇게 실감나게 표현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울러 자제한 것으로 보이는 묘사 몇 개도, 약간 더 센 방향으로 표현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어떤 분위기를 의도한 것인지는 알겠는데,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배우 중 한 명이 등장하는 극장 상영용 영화를 만들 때는 분명 타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눈앞에 자극적인 한 두 씬 정도는 있어야 사람들의 머리를 때리는 효과를 얻어낼 수 있죠. 정적으로 보이는 이미지들로만 가득 찬 장면들이 다소 아쉽게 느껴집니다.


5.


지나치게 평범한 주제도 걸림돌입니다.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왔고, 그리고 드디어 거짓의 시대가 끝났고, 소중한 것을 이렇게 잃어가고 있었다 - 좋은 주제입니다만, 영화로 만들기엔 조금 평범한 수준의 인식입니다. 호주를 일주일 쯤 여행하고 나면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는 건 맞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렇게 살고 있는데, 왜 우리는 그러지 못할까. 그리고 그 감정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게 되면 딱 이런 형태의 영화가 나오겠죠. 하지만 이병헌이 등장하는 영화를 볼 때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그 이상입니다. 조금 더 많은 사건, 조금 더 직접적인 연출, 조금 더 깊어진 주제. 이 영화에 부족한 것들입니다. 한때 이런 상황을 가리켜 얘기하는 딱 적절한 알레고리가 있었죠; "2프로 부족하다"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