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살면서 누구나 잘못 판단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내일은 또 블로그에 뭘 포스팅해야 하나?"라는 고민을 하다가, "그래도 최신 영화를 리뷰하는 편이 키워드 유입에 도움이 되겠지?"라는 생각을 하고 <루시드 드림>을 보기로 선택하는 순간 같은 것 말이죠. 사실 이 정도의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10분쯤 보았을 때, 자신의 판단 착오를 인정하고 과감하게 다른 영화를 다시 보기 시작하거나 혹은 다른 포스팅 거리를 알아보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미 본 시간이 아까워서, 결제한 돈이 아까워서, 이제부터 또 포스팅 거리를 찾는 게 귀찮아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계속 그 영화를 보고 있다면 당신은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흘러가버린 한 시간 오십 분은 내 인생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귀한 시간입니다. 물론 그 영화를 안 봤다고 한들, 다른 곳에 보람차게 썼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죠.
2.
아직 한 편도 메이드 되지 못한 대본 몇 개를 팔러 돌아다녀봤고, 앞으로도 다른 대본을 팔기 위해 돌아다닐 사람으로서 가장 짜증나는 사실은, 이런 대본도 배우가 붙고 투자가 붙어서 메이드 되는데, 자꾸 왜 나한테만 좀 더 치밀하게 써봐라, 좀 더 공감가게 써봐라, 다시 한 번 봐라 요구하는 게 많은가 하는 문제입니다. 제작되는 모든 영화가 다 <살인의 추억>이나 <올드보이>는 아닐 거 아닙니까? 적어도 <루시드드림>보다 괜찮은 대본은 제 원드라이브에도 몇 개 있습니다.
3.
설정만 떼어놓고 보면, 아주 못 봐줄 수준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소스코드>와 <인셉션>을 우라까이하는 콘셉트는 누구나 한 번쯤 해볼 수 있는 생각이긴 하죠. 문제는 그 콘셉트 위에 달라붙은 살점들이 하나같이 구리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시퀀스는 거의 자동기술이나 류철균 교수가 만들어낸 스토리 창작 프로그램 수준입니다. 아빠가 힘있는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는 기자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기자회견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필요 없는 장면입니다. 아들이 희귀혈액형이라는 암시를 주기 위해 고모랑 함께 있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너무 길 뿐더러, 없어도 됩니다. 다른 데서 더 은밀하게 슬쩍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게 아니면 아예 한 번 사고를 내서 제대로 보여줘야 합니다. 반창고 하나 붙이는 사건으로 쓰윽 언급하고 지나가는 건 굉장히 성의 없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놀이공원에 갑니다. 진부합니다. 이 이야기에는 두 명의 아버지와 두 명의 자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둘 다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가장 큰 게 "놀이공원에 함께 가는 것"입니다. 자식을 키워본 적 없는 감독과 각본가 입장에서 나오는 아주 전형적이고 성의없는 시퀀스입니다. 그리고 어쨌든 여기까지 전부 다 필요없는 씬입니다. 그냥 신문기사 몽타주와 함께 타이틀 시퀀스부터 시작해도 아무 문제 없었을 겁니다.
이야기에 대한 부분은 넘어가야 합니다. 아귀가 맞지 않고, 말이 되지 않는 부분을 일일이 언급하다 보면 며칠 밤을 새어도 모자랍니다. 저는 제가 쓴 각본은 까이고 이런 각본은 메이드 되는 것에 대해 아주 아주 불만이 많습니다.
4.
제작비가 넉넉하지 못했다는 게 보입니다. 마지막에 몰린 CG를 제외하면, 미술이나 특수효과에 쓰여야 할 돈이 하나도 없었을 것 같습니다. 혹은 돈이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화면을 만들었다면 감독의 연출력이 턱도 없이 부족했습니다.
이 이야기의 타이틀은 <루시드 드림>입니다. 그런데 주인공이 아들이 납치되고 난 뒤, 3년이 지나서야 우연히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루시드 드림"으로 범인을 잡은 사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누가 찾아와서 제안한 것도 아니고, 어떤 고생 끝에 알아낸 것도 아니고, 무슨 과정을 거쳐서 들어서 알게 된 것도 아니라, 네이버 검색하다가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연찮게 웹 검색으로 찾아낸 루시드 드림의 전문가가 한국에 있는데, 그게 본인 친구입니다. 이게 제대로 된 각본이 메인 타이틀이자 소재로 주인공을 인도하는 자세입니까? 거기에 연출이 한 방 더 먹입니다. 설정을 참조했음이 분명한 <인셉션>을 살펴보죠.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꿈을 설계하고 그 꿈에 들어가는 과정이 잘 그려져 있을 뿐더러 현실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꿈으로 접근하는 장비 키트 역시 그럴 듯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루시드 드림>에선 침대에 누워 머리에 전극 몇 개를 붙이는 게 끝입니다. 박유천의 공유몽 쪽은 그나마 미술이라는 게 들어가 있긴 합니다만, 그쪽도 따지고 보면 치과의자 하나와 모니터 4개가 더 있을 뿐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최소한 '루시드 드림'에 접근할 수 있는 장비들의 디테일은 더 챙겨야 했습니다. 이 영화의 타이틀이고 메인 소재니까요.
물론 변명을 들어줄 여지는 있습니다. 몇몇 장면이나 후반부 클라이맥스의 CG를 보면, 감독에게 아예 비주얼에 대한 비전이 없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꿈에 조언자가 들락날락 하면서 매트릭스처럼 활약한다거나 꿈의 세계가 무너지는 가운데, 꿈속에서만 할 수 있는 액션들 (하늘을 날아다닌다거나)을 아주 잠깐씩 보여주긴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면죄부가 될 수는 없죠. 결국은 감독이 책임져야 하는 일이니까요. 돈을 더 받아오거나, 돈이 없으면 없는대로 머리를 짜내서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비주얼을 보여주거나. 감독 본인은 최선을 다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화 초반에 고수의 입을 빌려서 그런 대사를 하게 만들면 안 됐죠.
"최선은, 결과가 나왔을 때 최선인 겁니다."
5.
물론 이야기와 시퀀스의 구성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심지어 나름 반전의 장치라고 준비했을 범인의 정체조차 진부합니다. 저도 30분쯤 지났을 때 한 번 의심했다가 '에이, 설마 아니겠지. 너무 진부하잖아'하고 넘어갔던 사람입니다. 더 안 좋은 것은 그게 밝혀지는 과정마저 뜬금없다는 것입니다. 최대호(고수)는 사건을 파고 들어서 사고하고 수사하는 게 아니라 그때 그때 단서가 발견되면 그것만 보고 즉흥적으로 물고 늘어집니다. 뇌가 아니라 척수와 반사신경으로 수사하는 사람처럼 '루시드 드림'이 보이면 '어, 맞아? 루시드 드림'. 대기업 회장이 보이면 '어? 맞아! 저 놈!' 이런 식으로 달려듭니다. '등장인물들이 멍청하다'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고, 나쁜 각본의 아주 전형적인 예입니다. 요즘에도 이런 식으로 각본을 쓰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좀 놀랐습니다.
너무 나쁜 말만 해대서 이 각본에 대해 뭐 좋은 얘기를 해줄 것이 없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 있더군요. 희귀혈액형에 대해 정보를 줍니다. 저는 혈액형이라고는 RH (+) (-) ABO만 있는 줄 알았는데, 사실 그건 큰 테두리일 뿐이고 수백 가지의 항원으로 다양하게 나눌 수 있다고 합니다. 영화만 보고 있으면 내 인생이 낭비되는 것 같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영화를 보면서 MkMk 혈액형(영화의 주요소재 중 하나입니다. 근데 이것 역시 대충 지나갑니다)에 대해 검색해 봤는데, 영화에 등장하는 MkMk뿐만 아니라 다양한 희귀혈액형들이 있더군요. MkMk는 전혀 항원이 없는 희귀혈액형으로 다른 피는 절대 받을 수 없고 오직 MkMk끼리만 수혈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건 O형도 마찬가지 안닌가요? 아주 희귀혈액형이라 문제가 되는 건가) 세계적으로 희귀한 혈액형으로 2010년대 초반의 지식인이나 웹문서들을 보면 '아직 한국에서는 한 명도 발견된 적이 없다'라고 나오는데, 영화에 나오는 명단을 보면 대략 10명은 넘어보이는 흔한 혈액형이 되었더군요. 그외에도 희귀혈액형으로 Cis-AB라는 혈액형이 있는데, 이건 한 사람이 ABO항원을 모두 가지고 있는 혈액형으로, 사실 살면서 의학적으론 별 문제는 없는데 AB형끼리 결혼했는데 가끔 자식이 O형이 나와서 이혼을 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스타일이라고 하더군요. 친자확인까지 가는 도중에 이미 부부관계는 많이 망가졌을텐데 알고 보니 '네 혈액형이 특이해서 그렇다'라는 결과가 나온 후에 부부관계가 다시 봉합되는 게 힘들다는 고민이 많았습니다. 재밌는 것은 Cis-AB 혈액형은 전세계적으로 한국에 제일 많다고 합니다. 아마 우리나라가 발생지인 것 같다는 추측을 하고 있는데, 전주 쪽에 많은 것으로 보아 백제 쪽 유전자인 듯 하다는 추측도 있었죠. 그외에도 한국에 단 한 명밖에 없는 것으로 밝혀진 밀텐버거 혈액형(이건 동남아 쪽에선 비교적 많이 발견되는 혈액형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단 3명이 가지고 있다고 하는 바디바바디하 혈액형, Weak-B형 등 희귀 혈액형의 종류는 굉장히 많으며,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도 많다고 합니다. 실제로 병원에서 수혈 시에 문제가 생겨 사망하는 경우의 대부분은 알려지지 않은 항원 때문에 생기는 일이라고 하더군요.
물론 이러한 트리비아가 영화에 다 나오진 않습니다. 하지만 차마 손절하지 못하고 이 영화를 보셨다면 이런 트리비아라도 찾아보셔서, 지식을 늘리는 게 속절없이 날아가 버린 내 인생의 1시간 50분을 보상하는 방법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봤습니다.
6.
사실 이 영화를 가지고 이렇게 긴 글을 썼다는 것조차도 죄송스럽습니다. 이렇게 길게 리뷰를 읽을 영화가 아닌데 말이죠. 이걸 한 문장으로 표현한(심지어 인용해서) 허남웅의 평이면 충분합니다.
(이하의 ps.엔 결정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ps.
1. <올드보이>와 <연애의 목적>에서 매혹적인 여배우였던 강혜정이 이런 식으로 낭비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 대한민국에 여배우가 출연할 영화가 진짜 없긴 없구나, 라는 생각이 먼저 들긴 합니다.
2. MkMk가 그 정도로 희귀혈액형이라면, 당연히 이들의 혈액을 미리 보관해 놓는 수혈은행같은 게 있었을 것이고 아들 역시 본인의 혈액을 평소에 약간씩 수혈해서 보관해 두는 방법 같은 걸 썼을 것이죠. 사실 전세계에서 혈액을 공수해 오는 것이 돈이 비싸서 그렇지, 아주 불가능한 것도 아닐 것이고 돈이 그 정도로 많은 대기업 회장이 그렇게 사랑하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범죄에 손을 대는 것보다는 돈을 많이 써서 해결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았을까요?
3. 이게 제일 이해가 안 가는데, 고수의 아들은 이미 말도 다 하고 아버지와 의사소통도 될 정도로 자라있는 상태였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고 잘 살고 있는 상태에서 유괴되었구요. 신체가 구속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잘 살아있을 뿐더러 어디 해외에 데려다 놓은 것도 아니고 차 타고 5~6시간이면 가는 남해에 있었는데 3년 동안 전화 한 통 안 했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 정도면 충분히 전화번호 외우고도 남는 나인데. 그 성당 수녀님들도 그렇습니다. 몇 개월동안 나라가 떠들썩할 정도로 텔레비전과 방송에 유괴된 사실이 보도됐던 아이인데 아무도 모르고 3년 동안 데리고 있기만 했다는 건 정말 이해하기 힘듭니다. 수도원도 아니고 텔레비전, 인터넷 다 되는 성당이더만.
4.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수 아들이 제 아들하고 좀 닮아서 마지막에는 울컥하긴 하더군요. 유괴는 진짜 나쁜 겁니다. 영화의 동기라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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