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존의 <스타워즈> 시리즈가 스페이스 오페라의 탈을 쓴 무협지에 가까웠다면,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이하 로그원)>는 <스타워즈>를 배경으로 한 2차 대전 전쟁영화에 가깝습니다. 구조나 인물, 그리고 사건은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의 기밀을 탈취하는 게릴라 부대의 활약을 그린 전형적인 전쟁영화와 1:1 매칭이 가능할 정도죠. 물론 스타워즈 시리즈의 인물들이 카메오로 얼굴을 비추기도 하고, AT워커와 같은 메카닉이 잠깐 등장하기도 하는 등, 연관성을 계속해서 보여주려고 애쓰고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둘의 구조는 전혀 다른 편입니다. 메인스트림의 <스타워즈> 에픽이 구원자의 피를 타고 난 영웅 가문의 서사 혹은 뛰어난 영웅의 몰락과 타락을 다루고 있다면, <로그 원>은 이름없는 일반 민중들이 팀으로 이뤄나가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죠. 때문에 <스타워즈>의 시그니처처럼 받아들여지는 라이트 세이버(광선검)를 이용한 일기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다스베이더가 등장해서 라이트 세이버와 다크 포스를 이용한 학살을 보여주긴 하지만, 그건 팬서비스용 깜짝쇼일 뿐입니다. 그것보단 나치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제복(?)의 스톰 트루퍼 군단과 반란군 게릴라 부대의 총격전이 이어지죠. 그 게릴라 부대엔 당연히 개성넘치는 인물들이 저마다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구요.
2.
초반의 전개가 좀 빠릅니다. 클래식 시리즈에 등장하지 않는 캐릭터들이 등장하고, 클래식 캐릭터들과 얽히기도 하며 캐릭터를 소개하는 장면이 연속해서 이어지고, 그러면서 몇 개의 행성을 오갑니다. 덜컹거리는 게 보이지만,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나면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죠. 그 과정까지 오는 초반이 재미없어서 몇 번이나 포기할까 생각했었습니다. 다행히도 적당한 시점에 데스스타가 작동을 시작하고, 후반부에 속도감이 붙기 시작합니다.
3.
<로그 원>을 이야기하기 전에 앞서 알아두면 좋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스타워즈 EU이지요. 스타워즈 EU란 Expand Universe의 약자로, 스타워즈의 확장 세계관을 뜻합니다. 사실 스타워즈 시리즈라면 덕중의 덕, 양덕들이 가장 환장하는 컨텐츠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팬픽이 없을 리가 없고, 스타워즈의 역사가 오래 되었기 때문에, 스타워즈의 팬을 자부하는 사람들이 그 세계관 아래서 써낸 수많은 팬픽들이 존재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팬픽이나 아마추어 작품들이 모두 EU에 포함되는 건 아닙니다. 다만 그 작품들 중에서 루카스 아츠의 공식적인 인증(certifiaction)을 받은 작품들이 있는데, 이 작품들의 설정이 모두 스타워즈 EU에 포함되는 것이죠.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것이었습니다.
사실 스타워즈 세계관은 조지 루카스가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에피소드 1~6과 클론전쟁의 이야기들 사이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있습니다. 각각의 에피소드 앞에 나오는 설명은 전편 줄거리의 요약이 아닙니다. 전편이 끝난 지점에서도 몇 가지의 사건을 건너뛴 경우가 훨씬 많죠. 이를테면 에피소드6과 7사이에는 얼마나 많은 역사적 사건이 존재합니까. 에피소드 2와 3사이도 마찬가지죠. 이에 따라 당연히 이 빈 역사를 채우려는 팬들의 수많은 노력이 있었고, 루카스 아츠는 그런 팬들의 노력에 인증으로 답했습니다. 사실상 EU인증 자체를 받는 건 그닥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때문에 EU인증을 받은 소설과 텔레비전 쇼, 게임 등으로 지난 30년 동안 약 25,000년 정도의 스타워즈 역사가 채워졌다고 하는데요. 당연히 이렇게 많은 EU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다 보니 EU 세계관 내에서도 충돌이 일어날 수 있겠죠. 그렇기 때문에 그 안에서도 나름 등급제가 존재합니다.
조지 루카스가 직접 만들어 낸 가장 높은 등급의 G캐논, TV시리즈의 설정인 T캐논, 스타워즈 타이틀을 갖춘 작가들에 의해 탄생한 C캐논, 스타워즈 마블 카툰 등의 세계관에서 비롯된 S캐논, 평행우주처럼 설정을 무시해도 괜찮은 N캐논과 스타워즈 디투어 설정을 다룬 D캐논 등으로 등급이 나누어져 있으며, 이중 N캐논과 D캐논은 관리자들에 의해 부적합 판정을 받은 등급이라고 합니다.
누군가가 그러더군요. 영화 6편과 텔레비전 시리즈만 가지고 어떻게 30년 동안 덕질을 하냐고. 덕질을 하려면 이 정도의 컨텐츠와 복잡성은 있어야 가능하다구요. 역시 덕중의 덕은 양덕이긴 합니다. 그리고 아마 저쪽동네에 가면 (우리 어르신들이 예전에 하던 말씀대로) 지네 부모님 생일은 못 외워도 각 캐논 별로 저 세계관의 설정은 빠삭하게 외우고 다니는 애들이 쫙 깔려있겠죠.
그러나.
4.
이렇게 번성하던 EU에 큰 문제가 생겼으니, 그것은 디즈니가 스타워즈의 판권을 인수하면서 발생합니다.
디즈니가 쿨하게도 "클론 워즈 외의 EU는 인정하지 않겠다"라고 밝혀버린 것이죠. 왜냐면 기존의 EU를 인정해버릴 경우, 에피소드6 이후의 이야기가 너무 빼곡하고 장대하게 펼쳐져 있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도 진행시키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기존의 스타워즈 팬보이들은 디즈니에 저주를 퍼부었지만, 디즈니는 기존의 EU 세계관을 완벽하게 무시한 에피소드 7을 내놓습니다. 그리고 에피소드 7은 새로운 역사를 이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J.J.에이브러햄스가 <스타트렉>에 해놓은 일을 똑같이 반복하죠. 클래식 세계관을 살짝 비틀어 카피하는 것입니다. 퍼스트 오더라고 이름만 바뀌었을 뿐, 에피소드 7의 구도는 '제국군 vs. 저항군' 그대로이며, '스타 킬러'는 그냥 데스 스타의 업그레이드 판일 뿐입니다. 카일로 렌은 다스 베이더의 짝퉁이며, 그놈의 '아버지와 아들' 구조조차도 다시 한 번 반복 생산 되지요. 모든 것이 에이브러햄스의 장기 그대로입니다. 익숙한 구조를 가져오되, 그 세부적인 사항들을 교묘하게 비틀어서 원작의 팬보이들과 신규 유입자들 모두에게 친숙함과 신선함을 함께 주는 것이죠.
5.
에피소드7에 비하면, 그래도 <로그 원>은 훨씬 더 스타워즈의 정통적인 EU에 맞닿아 있는 작품입니다. 일단 스토리는 에피소드 4 직전의 비워진 역사를 메우고 있고, 나름 오리지널로 만들어진 스토리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죠. 문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 결말까지 알고 있는 에픽의 빈 공간을 찾아서 덧칠하는 작업이, 팬보이들을 대상으로 한 돈벌이 외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입니다. 예전에 <삼국지>의 여러 사건들을 무명 병사의 시선에서 재구성하는 구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만, 그것 역시 동양에 가득한 <삼국지> 팬보이들의 유희거리 정도 밖에 안 되겠더군요. 물론 앞으로도 디즈니는 <스타워즈>를 이용해서 팬보이들의 주머니를 털어먹을 여러 가지 유형/무형의 상품들을 만들 것이고, 마블 유니버스의 성공 이후로 하나의 유니버스 안에서 다양한 이야기들을 생산해 내며 사람들에게 세계관을 주입하는 시도가 계속되겠죠. 그러면서 점점 더 이야기들의 진입장벽은 높아질 것입니다. 물론 아직 따라가는 게 힘겨워질 나이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류의 컨텐츠는 2시간 동안 부담없이 즐기기 위해 보는 것인데, 그러기엔 점점 더 수용자에게 요구하는 것이 너무 많아지는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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