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블로그를 시작하고 나서, 키워드 유입을 위해 최신 컨텐츠들을 보기 시작했었습니다. '했었습니다'는 과거형이죠. 예, 어느샌가 예전에 즐겨봤던 컨텐츠들을 다시 보고 있더군요. <은하영웅전설>을 완역판으로 다시 읽기 시작했고, 관련된 일 때문에 <버피 더 뱀파이어 슬레이어>를 다시 보기 시작했으며, 갑자기 <척>도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안 봤으면 후회할 뻔 했어요. 제가 <척>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거든요.
2.
오래 전에 애정했던 컨텐츠를 나이가 든 시점에서 다시 본다는 것은, 추억에 잠길 수도 있지만 또 그 추억을 파괴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나이가 들어서 산울림이나 이문세의 노래를 듣는 것과는 조금 달라요. 노래는 아무리 촌스러워도 나이가 들어서 들으면 추억이 되살아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상하게도 예전엔 참 좋아했는데, 나이 들어서 들으니까 연주도 촌스럽고 멜로디도 별로다, 라고 생각되는 경우는 별로 없죠.
하지만 드라마나 영화, 책은 아닙니다. 유통기한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팬시한 문화 컨텐츠들은 얼마 안 되는 시간의 흐름에도 굉장히 큰 영향을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전'이니 '명작'이니 하는 것들이 등장하는 것이죠.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다시 감상해도 좋은 컨텐츠가 '시간을 이겨낸 명작'의 반열에 오릅니다. 2000년대 초반에 <쉬리>나 <접속>을 다시 보면 굉장히 촌스럽게 느껴집니다. 겨우 5년 남짓의 시간 동안에 그 빛을 잃어버리는 거죠. <원더이어즈>는 나이가 들어서 보아도 좋아보이지만, <맥가이버>는 리부트나 오리지널 모두 지금 보면 몹시 촌스럽습니다. 무엇보다 <맥가이버>의 오리지널은 지금의 하드한 과학적 검증도 통과하지 못할 것이고, 정치적인 공정함에서도 엉망이며, 심지어 시즌 1의 초반은 <이탈리안 잡>을 표절하기까지 했죠. (근데 이런 경우는 종종 있습니다. <크리미널 마인드>도 시즌1에 <싸이코>의 모티브를 그대로 따온 에피소드가 있더군요)
다행히도, <척>은 세월이 흐른 뒤 다시 봐도 여전히 재밌고 신나는 컨텐츠였습니다.
2.
개인적으로 몇 번을 보든, 어디서 보든 좋아하는 설정이 몇 개 있습니다. 하나는 평범하게 살던 기크/너드가 갑자기 우연한 기회에 어떤 특별한 능력을 얻게 되고, 그 능력 때문에 국가적인 대규모의 위기를 해결한다는 설정, 그리고 서로 잘 알지 못하는 남녀가 어떤 사정 때문에 가짜 연인을 연기하는 설정이죠. 스토리텔링이 탄생한 이래, 수억 번을 써먹은 클리셰들이지만, 저는 이게 볼 때마다 재밌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을 거예요. 아직도 반복 되는 걸 보면요. <척>의 초반부는 이 두 개의 설정을 모두 활용합니다.
3.
<척>의 파일럿은 제 기준에서 보면 완벽함 그 자체입니다. 42분이라는 미드 1편의 표준 러닝타임 속에(파일럿이라 2편으로 구성된다든지, 러닝타임이 조금 더 길다든지 하는 꼼수가 없죠) 알차게 담아야 할 것들을 꾹꾹 눌러담았습니다. 척과 모건, 그리고 캡틴 어썸과 척의 누나, 바이 모어의 필요한 등장인물이 깔끔하게 소개되고, 거대한 음모가 나타나고, 그 음모가 타이틀롤과 깔끔하게 연결되고, 그 와중에 금발 글래머 여전사/킬러가 나타나 주인공 너드와 가짜 연인 행세를 합니다. 그 와중에 주요 요인의 암살까지 막아냅니다. 파일럿 에피소드에 이 이상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물론 <미스터 로봇>이나 <웨스트월드> 같은 미드를 즐겨 시청하는 지금의 기준으로 바라보면 확실히 촌스러운 건 어쩔 수 없습니다. 2000년대 초반의 작품이지만, 사실 그때도 최신 트렌드라기보다는 80년대 <위즈키드> 같은 작품의 2000년대식 업데이트 같은 느낌이 강한 시리즈였어요. 그러다 보니 지금 느끼는 촌스러움이나 스토리의 비약이 의도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 있고, 그것이 오히려 어색함을 상쇄시키는 장점이 있습니다. 물론 판타지나 비현실의 세계를 의도적으로 리얼리즘에 자연스럽게 편입시키는 요즘의 연출트렌드와는 좀 동떨어진 작품인데,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저는 그런 류의 연출보다 이게 더 좋거든요.
4.
<척> 덕분에 한동안 핫한 라이징 스타의 대표로 언급되던 재커리 리바이는 요즘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써놓고 검색해보니, 어라, 무려 <토르: 다크월드>에 나왔었더군요. (새로 시작한 <히어로즈> 5시즌에도 나옵니다만... 2015년에 <히어로즈>가 방영되었다는 게 더 놀랍네요) 요즘 사진을 검색해 보니 <척>의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중후하게 늙었네요.
어쨌든 재커리 리바이를 제외한 나머지 캐릭터들은 사실 스테레오 타입의 향연이라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금발 글래머 여전사와 근육질 NSA 요원, 수염기른 털보 기크, 깐깐한 동양인 관리직까지... 80년대의 키치한 분위기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죠. 하지만 전 이걸 여전히 신나게 즐기고 있는 걸 보니 제가 늙어간다는 사실이 슬슬 실감나기 시작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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