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 9월에 쓴 글에 ps.를 덧붙였습니다.
<몽크>가 8시즌의 16번째 에피소드를 끝으로 긴 여정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그건 저에게도 굉장히 남다른 감회를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왜냐하면,<몽크>는 제가 시작과 끝을 함께한, 아직까지 는 제 인생에서 유일한 시리즈이기 때문입니다. 몇 개의
시즌이 진행된 후에, 사람들의 평가를 듣고 지난
방송분을 따라잡는 저의 시청습관과는 달리, 저는 군대에서<몽크>의 파일럿 에피소드를 시청했습니다. (물론 본방으로요) 그리고 매 에피소드를 빠짐없이 한 주 한 주 기다리며 종영까지 달려왔죠. 그러니까
정말, 8년 동안을 그와 함께 한 셈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몽크의 후반 2시즌이 "완전히 말아먹은" 수준에 가까웠다고 해도, 그 실망감을 뒤로 하고, 이 시리즈의 종영에 대해 한두 마디 쯤은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몽크>의 최초 아이디어는 전통적인 추리물의 컨벤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Defective Detective'라는 말장난으로
잘 알려진 그 컨벤션은 우수한 천재적 탐정에게 극복할 수 없는 신체적/정신적 괴팍함을 부여하는 것이었죠. 오거스트 뒤팽은 오만한 자아도취형 인간이었으며, 셜록 홈즈는 거기에
분노조절 치료가 필요한 코카인 중독자의 성질을 더했습니다. 물론
그 정도는 어느 정도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할 정도지만, 더
심각한 경우도 있습니다.
드루리 레인은 청각장애인이었고, 맥스 케러도스는 맹인이었죠. 네로 울프는 당시에도 심각한 과체중이었습니다. 파일로 밴스 정도 되는 오타쿠 형 인간이 비교적 정상으로 보일 정도니까 두말 할 필요 없었죠.
물론 클래식한 추리소설의 황금기가 끝나고 난 후에는
이런 현상이 많이 사라집니다. 대신 사실적이고 폭력적인 형사물이 그 뒤를 잇죠. 그리고 이후에는<CSI>로 대표되는 과학수사'가 추리물의 트렌드를 차지합니다.<몽크>는 그런 흐름을 과감히 거스르는 Back to the origin의
기획이었습니다. 핸디캡을 가진 천재탐정의 등장, 과학수사보다
직감과 빼어난 추리에 의존하는 사건 해결방식, 같은 것들 말이죠. (실제로<몽크>는 2시즌에<CSI>를 패러디한 드라마를 등장시켜 그들의 사건 해결 방식을 은근슬쩍 비웃습니다)
파일럿을 비롯한<몽크>의 첫번째 시즌은 훌륭했습니다. 대단한 인기를 끌었고, 평가도 아주 좋았죠. 자폐증을 비롯한 20가지 공포증을 동시에 앓고 있는 토니 샬룹의
연기는 극찬을 받았고, 시리즈는 많은 상을 획득했습니다. 더군다나
이 시리즈는 굉장히 많은 장르에 발을 걸치고 있으면서도 어느 장르에서도 빠지지 않는 빼어난
퀄리티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미스테리는 정통적인 후더닛부터
도치적인 구성까지 매 에피소드마다 다채롭게 활용되었으며, 동기가 다소 약하고 과정이 비약하는 면이 있었으나
적정 수준의 트릭과 추리도 수준급이었습니다. 전체적인 추리물로서의 퀄리티는 들쑥날쑥 했지만, 가끔 등장하는 빼어난 에피소드들이 모자라는 부분에 대한 아쉬움을 채워줄 수 있었죠.
더 좋은 건,<몽크>의 핸디캡이 재밌는 코미디의 소재이기도 했지만, 비인간적인 천재
탐정에게 '인간적인 진짜 고뇌'를 부여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진정 사랑하는 단 한 명의 부인의 살해범을 찾지 못한 천재탐정은 항상 그 사실 때문에 힘들어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사건을 풀어나가는 이유가 됩니다. 초창기에 보여준<몽크>의 가능성은 무궁무진 했습니다. 위대한 탐정의 훌륭한 추리물이
될 수도 있었고, 동시에 고통받는 천재탐정의 인간적인 드라마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작가진이 택한 것은, 가장 안전한 선택이고, 너무나 초라한 야심이었습니다. 다섯 번째 시즌을 넘기면서 그들은 몽크의 신경증에서 인간적인
고뇌를 지우고 오로지 코미디의 소재로만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와 더불어 랜디의 바보짓은 점점 많아지고, 정도가 심각해졌으며, 후더닛과 도치 플롯과 스릴러 형식을 오가던 다양한 구성은 후더닛으로 통일되면서 추리물은 점점 더 시시해졌습니다. 사람들은<싸이크>를 가리켜
"조금 머리 나쁜 사람들을 위한<몽크>"라고
이야기 했지만, 시즌 5쯤 되면 추리적인 면이나 드라마에
있어서<싸이크>와<몽크>를 구분할 수 있는
부분은 거의 없어집니다. 다만 코미디의 방식이 다를 뿐.
거짓말이 아니라 저는 7시즌과 8시즌에 방영된 32개의 에피소드들 중에 30개 이상에서 범인을 맞췄습니다. (심지어 어이없게 트루디 살해범까지 맞춰버렸죠. 몽크도 12년 동안 풀지 못한 사건을!)
그나마 이 시리즈가 8시즌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코미디의 힘입니다. 추리물에서, 드라마에서, 이 시리즈가 무너지고 있는
와중에도 코미디는 굉장히 빼어나고 타이밍도 좋았습니다.
가끔 랜디의 어이없는 바보짓이 좀 거슬렸던 것을
빼면, 이 작가들은 굉장히 다양한 형태의 코미디를<몽크>안에서 시험 했었습니다. 랜디의 바보 코미디, 몽크의 캐릭터 코미디, 스토틀마이어의 로맨틱 코미디, 가끔
던지는 시니컬한 유머, 시리즈와 방송에 대한 메타적인
유머, 어쩔 때는 몸개그까지... 8시즌의 후반에서 시리즈가 완전히 무너지기 전까지 코미디는<몽크>를 서있게 하는 유일한 뼈대였습니다.
대신 이 작가들은 코미디를 제외한 모든 면에서
최소한의 성의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지난 8년 동안<몽크>의
가장 큰 질문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트루디를
죽인 범인, 다른 하나는 몽크의 경찰 복직... 그런데 시리즈는
그 두 개를 너무나도 평범하게 다뤄버립니다. 몽크는
경찰 복직을 했다가 한 주만에 때려치우며, 트루디는 지난 시즌 동안 끊임없이 던져왔던 떡밥들과는 전혀
상관없이, 난데없는 비디오 고백으로 해결됩니다. 그리고 8년 동안 조금도 성장하지 않던 몽크의 인성은 마지막 에피소드의 남은 30분 동안 깜짝 놀랄만큼
성장합니다. 그래서 몽크의 파이널 에피소드는 시작한지 20분만에 범인을 잡아버리고, 나머지 20분을 처음 등장한 몽크의 씨다른(?) 딸과 보내는 훈훈한 에피소드로 채워넣습니다. 이 현상은 딱 한 가지로 밖에 설명되지 않습니다. 작가와 제작진이 그냥 대충 만든 거라고.
언제부터 작가진이 몽크란 캐릭터에 대해 애정을
잃어버렸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은 시리즈 내내
몽크를 성장시키지도 않았고, 그의 고뇌를 해결할 기회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자, 이제
끝내야지." 해놓고 마지막 에피소드 40분 동안
묵은 과제를 단숨해 해결합니다. 트루디 살해범은 트루디의 비디오 고백으로
밝혀지고, 몽크의 성장은 갑자기 나타난(심지어 자기 씨도 아닌 살해범의 씨) 딸의 등장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걱정되는 건, 랜디가 서장으로 가게 되는 뉴저지 경찰서입니다. 랜디가 여태까지 보여준 활약만 봐서는, 뉴저지 지역의 치안이 매우 위험해질 것으로 보입니다. 뭐, 샤로나한테는 잘할지 모르겠지만.
8년 동안 변함없이<몽크>라는 시리즈를 지켜왔던 팬들은 좀 더 나은 결말을 요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몽크>초창기에 던졌던 거대한 음모의 희생양이 된 트루디와
그 음모를 파헤치는 몽크의 활약상을 감상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의 성의없는 결말로 끝내기에<몽크>는 너무나 빼어나게 시작한 시리즈였습니다.
제작진의 무능이,
아니면 제작진의 무성의가 훌륭한 배우와 캐릭터를, 그리고 시리즈를 얼마나 형편없이 망칠
수가 있는가에 대한 좋은 예로, 아마 제 기억에 당분간 <몽크>는 그렇게 남아있으리라고 생각 됩니다.
ps. 그리고 몽크는 또 하나의 재밌는 전례를 남겼습니다. '사회적으로 배려가 부족한 괴짜-천재 탐정'과 그를 케어하는 여성 조합의 수사물이라는 장르의 시초가 되었고, 이것은 후에 <멘탈리스트>와 <엘리멘터리>로 이어졌습니다. 물론 그 기본 뼈대는 <X파일>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뒤의 시리즈들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건 <몽크>가 더 크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장르적인 특성상 둘 사이의 로맨스를 배제하는 것이 원칙인데, (<멘탈리스트>에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멘탈리스트>의 경우엔 이 원칙에서 벗어났다는 점이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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