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net의 주력 프로그램이라면 아무래도 오디션 프로그램,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리얼리티 경쟁 프로그램을 뽑을 수 있을 것입니다. <슈퍼스타K>와 <쇼미더머니> 같은 프로그램이죠. 이러한 프로그램 중에서 특히 화제성과 완성도가 높았던 시즌들이 있습니다. <슈퍼스타K> 시즌2, <쇼미더머니> 시즌3, 그리고 <언프리티 랩스타> 시즌1이죠. <프로듀스 101>도 아마 첫 번째 시즌이 가장 뛰어난 시즌이 될 가능성이 높아보이지만, 비교될 대상이 없으니 그건 제외하구요.
위에서 언급한 시즌들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프로그램 내의 캐릭터의 배분과 성장, 드라마가 모두 (작가가 써준 것처럼)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지는 방향으로 흘러갔다는 것이죠. <슈퍼스타K>의 두 번째 시즌의 스토리는 영락없는 신데렐라 스토리 드라마였습니다. 외모와 배경, 지적인 매력까지 갖춘 무적의 상대에게 도전하는 배관공 출신의 성공 스토리에, 독특한 매력을 가진 4차원 여성과 밉지 않은 까불이 캐릭터까지, 매력적인 인물들도 많았지만, 그들이 다 살아남아 이렇게 완벽한 조합으로 TOP 4가 남게 되는 경우는 절대로 쉽게 볼 수 없었습니다. 물론 이런 결과가 나타나기까지 분명 제작진이 여러 가지로 노력했음은 분명하지만, 어쨌든 자연스럽게 보이면서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낸 것에는 상당부분의 행운도 함께 따랐음을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리얼리티 배틀 프로그램 역시 대본의 영향을 상당 부분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상치 못한 돌발상황들이 튀어나와 종종 흐름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까지 망치는 경우를 너무 많이 보아왔으니까요. <슈퍼스타K>의 두 번째 시즌은 빼어난 제작진의 역량과 행운이 함께 만들어 낸 리얼리티 배틀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스토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쇼미더머니3>는 바스코라는 '끝판왕'을 세워놓고 바비라는 젊은이가 성장하면서 도전하는 스토리를 잡았습니다. 그 옆을 받쳐주는 캐릭터는 왠지 싸움 좀 하는 멋진 놈처럼 보이는 아이언, 그리고 반대로 진지하게 연구하고 공부할 것 같은 모범생 타입의 올티였죠. 바스코는 프리더였고, 바비는 손오공이었으며, 올티는 크리링이고 아이언은 피콜로 같았습니다. 바스코 역시 매력적인 캐릭터였음에도 불구하고, 스토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바비가 바스코를 꺾기를 바라게 만들고 있을 정도로 흡인력있게 구조를 잘 짰습니다. 하지만 바비가 어느 한 순간 삐끗했더라면, 이 멋진 드라마는 절대 나오지 않고, 그냥 바스코의 우승으로 끝나버렸겠죠. 역시 제작진의 노력에 운때가 맞아준 결과였습니다. <언프리티 랩스타>의 시즌1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서의 <쇼미더머니>와 <슈퍼스타K>가 하나의 커다란 스토리라인을 가진 이야기였다면, <언프리티 랩스타>의 첫번째 시즌은 옴니버스 스타일의 구성을 짰습니다. 시청자들은 타이미와 졸리브이의 질긴 악연, 육지담의 성장스토리, 제시의 캐릭터 코미디, 지민의 분전, 치타의 활약 등 개별 스토리들을 골라 볼 수 있었고, 또 각각의 스토리가 모두 매력이 있었습니다. 이 역시 육지담이나 지민이 제작진이 원하는 만큼의 실력을 보여주지 못했다면 이만큼의 재미를 뽑아내기 힘들었을테지만, 정말 하늘의 도움이라고 볼 수 밖에 없는 기적같은 성장으로 끝내주는 스토리를 만들 수 있었죠. 역으로 예지를 밀어주려 그렇게 애썼지만, 반전 없이 결국 트루디의 독주로 끝나버린 시즌2나 뭔가를 보여줄 것처럼 스토리를 만들어 보려 해도 배틀만 붙었다 하면 가사를 절어대며 한 발짝도 성장하지 못했던 유나 킴의 시즌3를 생각해보면, '힙합 밀당녀'였던 육지담의 괄목할만한 성장과 지민의 분전이 시즌1에 얼마나 대단한 행운이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2.
저도 나이가 있는 편이라, 아무래도 고등학생들이 피어싱을 하고 나와서 랩을 뱉어대는 <고등래퍼>를 보면 깜짝 깜짝 놀라긴 합니다. (우리 땐 안 그랬는데 말이야~ 요즘 애들은 말이야~) 처음에는 학예회 수준의 랩을 하는 친구들이 계속 나와서 '공부나 할 것이지 고딩들이 나와서 실력 떨어지는 랩이나 하고...'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구요. 하지만 경연이 진행되어 갈수록 역시 흥미로운 캐릭터들이 나오기 시작하더군요. 그리고 M.net의 제작진들은 또 한 번, 있는 캐릭터들을 잘 섞어모아 그럴 듯한 구도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습니다.
만들어진 부분도 있겠지만, 양홍원과 최하민의 대립은 굉장히 흥미로운 구도입니다. 무협지로 따지자면 정파와 사파의 대결 같다고나 할까요? 양홍원은 피어싱과 귀고리를 하고, 사생활에 대한 논란도 있는 학생입니다. 아무래도 공부를 잘하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척 들어보면 단번에 알 수 있죠. 랩 하나는 진짜입니다. 틀림없는 실력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감도 있고, 실력도 있습니다. 강력한 우승 후보 중의 하나고 나름의 명성도 가지고 있습니다.
반대편에 최하민이 있습니다. 사생활도 잘 관리되어 있고, 공부도 잘하는 타입에 보여지는 인간성도 훌륭한. 그리고 랩을 잘 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진지한 태도로 본인의 음악에 접근하며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고 조용히 성장해 가고 있는 캐릭터죠. 사실 제 생각엔 여기에 장용준까지 남아있었다면, 한쪽에서 또 하나의 균형을 잡아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엠넷 제작진은 장용준을 끌어들여 정파와 사파의 대결에 한쪽에서 고독한 살수(殺手)처럼 둘 사이를 위협하는 그림을 만들고 싶어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장용준을 떼어내게 되면서, 계획을 수정한 것 같습니다. <고등래퍼>의 메인스토리는 이 상반된 두 캐릭터의 대결이 될 가능성이 높아보이죠. 그렇기 때문에 논란에도 불구하고 양홍원은 하차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논란이 더 커지고 제작진이 양홍원의 대체재를 찾아내면 입장이 바뀔 수도 있겠지만요.
3.
양홍원과 최하민이라는 메인 구도가 잡혔지만, 아직 <고등래퍼>가 넘어야 할 산은 많습니다. 무엇보다 서브 플롯을 담당해줄 캐릭터들이 부족해 보인다는 건데요. 개인적으로는 고등학생들이 등장하니까 여고생과의 풋풋하고 달달한 스토리가 들어갔으면 좋을 것 같은데, 이게 여의치 않습니다. 여기서 제작진의 고민을 엿볼 수 있습니다. 문지효 학생이 랩을 조금만 더 잘 했다면 훨씬 큰 스토리에서 활약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1회성으로 퇴장할 수밖에 없는 실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작진은 그 1회성에서 조금이라도 더 분량을 빼내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것은 그 이후에도 여자들이 끼어드는 풋풋한 스토리가 별로 없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입니다. 아니나다를까, 경연이 계속될수록 여고생 참가자들은 계속 탈락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서브플롯을 채워주면서 경쟁의 긴장감을 조금 해소시킬 수 있는 캐릭터를 과연 제작진은 찾아냈을까요?
의외의 실력으로 최하민 양홍원의 독주를 막거나 견제할 수 있는 캐릭터들도 필요합니다. MC그리나 마크는 그 정도의 위치에 갈 순 없을 것 같고, 이수린이나 윤병호 등이 후보군에 있는 것 같지만, 과연 어디까지 만들 수 있을까요. 저는 궁금합니다.
4.
어쨌든 M.net은 <쇼미더머니>와 <언프리티 랩스타>에 이어 <고등래퍼>를 론칭함으로써, 힙합 경연프로그램을 3개나 갖게 되었습니다. <언프리티 랩스타>가 <쇼미더머니>의 여성형이었다면, <고등래퍼>는 youth version쯤 되는 것일까요. <언프리티 랩스타>의 첫 시즌은 <쇼미더머니>의 탈락과 진출이 반복되는 직선형 구조의 스토리텔링을 여성들간의 질투와 친목이 공존하는 다층적 스토리텔링으로 성공적으로 전환시킨 바 있습니다. 즉 참가자들의 특성에 따라 프로그램 스토리의 구조도 따라가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고등래퍼> 역시 비슷한 경향을 보입니다. 원래 힙합이 허세와 스웩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아시다시피 저 나이가 인생에서 가장 허세와 자신감이 심할 나이라 그런지, 자연스럽게 허세를 떠는 모습들이 민망하면서도 귀엽게 보이는 것도 매력이구요. 딱 저 나이대의 아이들이 등장하는 일진만화 - <짱>이라든지 - 의 구조로 흘러가는 스토리나 캐릭터들도 인상적입니다. 분명히 계속 보고 있으면 "내가 이 나이 먹고 저걸 왜 보고 있나..."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왠지 이번 주 금요일에도 또 다시 찾아보게 될 것 같군요. 과연 <고등래퍼>는 양홍원-최하민의 구도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서브 캐릭터와 플롯으로 엠넷의 또다른 성공작 리스트에 이름을 올릴 수 있을까요? 그래서 더더욱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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