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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텔레비전

<프로듀사>에 관한 몇 가지 잡담

by 이어원 2017. 3. 7.

2015년 5월에 쓴 글입니다.




1.


현재 명실상부한 No.1 스타인 김수현의 컴백작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프로듀사]는, 예능국 내에서 벌어지는 복잡하게 꼬인 헛소동을 다루고 있는 드라마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드라마의 제작과정도 이 드라마의 스토리 못지 않게 재밌고 흥미진진한 편이죠.


다들 알고 있다시피 [프로듀사]의 시작은 독립영화 감독으로 잘 알려져 있는 윤성호 감독부터입니다. 윤성호 감독은 단편 [삼천포 가는 길]을 통해 독립영화계에 (정말 흔하고 부끄러운 표현이지만) '혜성처럼 등장'한 뒤, [은하해방전선]이라는 독특한 장편영화 데뷔작으로 매니아들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윤성호 감독은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세계와 유머감각을 견지하면서도, 다른 독립영화 감독들과는 달리 방송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작업들을 끊임없이 시도합니다. 특히 윤성호 감독은 미국 시트콤 [오피스] 스타일의, 다큐멘터리와 시트콤이 결합된 형식의 창작물에 매력을 느꼈고, 또 이것을 가장 잘 한국화 시켜서 들여올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MBC Every 1을 통해, 모큐멘터리와 시트콤이 결합된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라는 작품을 내놓죠.


하지만 방송계는 녹록지 않았습니다. 윤성호 감독 본인의 말에 따르면,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이후 비슷한 기획과 많은 연출제의가 들어왔지만, 많은 회사들이 이에 대한 노하우만 바랐을 뿐이고, 결국은 윤성호 본인이 아니더라도 자신들끼리 충분히 이런 형식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케이블에서 이런 형식의 컨텐츠가 많이 나왔고, [음악의 신]이나 [방송의 적]처럼 성공을 거두는 작품들이 나타났습니다. 재밌는 건 윤성호 본인도 [음악의 신]팀의 [엔터테이너스]에 직접 출연한 적이 있다는 것이죠.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성호 감독은 이런 형식에 대한 본인의 노하우에 꽤 자신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다음을 통해 공개한 웹드라마 [썸남썸녀] 역시 비슷한 형식의 모큐멘터리 시트콤이었고, 나름 여러 개의 작품을 통해 '윤성호 사단'이라 불릴 수 있는 연기자들도 만들었죠.


실제 존재하는 지상파 방송국의 예능국을 무대로 실제 예능 프로그램을 등장시켜 [오피스] 스타일의 시트콤을 만든다는 기획이 원래 윤성호 본인의 것인지, 아님 원래 있던 기획에 연출자로 윤성호 감독이 캐스팅 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전자라고 추측합니다. 윤성호 감독은 이 기획을 여러 곳에 들이밀어 봤을 것이고, 그중에 KBS 예능국 CP인 서수민 PD가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어쨌든 윤성호 감독에게 이것은 큰 기회였죠. 단숨에 지상파에 진출하게 되는 것이었으니까요.


3.


그런데 이 행운은 점점 더 불어나면서, 결국 독이 되었습니다. 예능작가 출신으로 A급 드라마 작가가 된 박지은 작가(내조의 여왕-넝쿨째 굴러온 당신-별에서 온 그대)가 기획안을 보고 본인이 이 기획을 하겠다고 들어왔고, 서수민 CP는 이걸 마다할 이유가 없었죠. 박지은 작가가 들어가면서 김수현이라는 감당할 수 없는 스타가 따라 들어왔고, 그러면서 이것은 김수현-차태현-공효진-아이유라는 특급스타들이 포진한 큰 프로젝트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방송국은 이 거대한 프로젝트를 마이너한 감성의 독립영화 감독에게 맡겨둘 수는 없게 되었죠. 윤성호 감독은 하차하고, 결국 표민수 감독이 영입됩니다.


4.  


그렇게 만들어진 [프로듀사] 1부는, 그래서 더 기괴하게 보입니다. 설정과 대사의 리듬은 전형적인 윤성호 스타일인데, 이것을 제대로 윤성호의 리듬에 맞게 소화해내는 것은 원조 윤성호 사단이었던 박혁권 밖에 없습니다. 윤성호는 신인연기자들을 철저하게 자신의 리듬에 맞춘 대사로 리딩시키는 사람인데, 차태현, 공효진, 김수현이 윤성호의 리듬에 대사를 맞출 이유는 없으니까, 그들은 자신의 톤으로 연기를 합니다. 하긴 애초부터 윤성호 특유의 찌질한 대사가 거기에 들러붙지도 않습니다. 1부 중반이 넘어가고 박지은 작가가 각 배우들의 톤에 맞춰 써놓은 대사가 어느 정도 나오면서 공효진, 차태현은 자신의 대사를 입에 붙입니다. 훈련된 드라마 작가+예능 작가란 게 이렇게 무섭죠. 스타를 다뤄본 작가는 그 스타의 톤에 맞춘 대사를 적확하게 씁니다. 특히 예능 작가 출신이라 자신의 톤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각자의 톤을 정확하게 맞추는 것은 박지은 작가의 빼어난 재능입니다. 넝쿨당에서 김남주의 도시적이고 깔끔한 톤에 들러붙은 대사, 이희준의 능청스런 톤에 붙는 대사, 별그대에서 전지현의 하이톤에 붙는 대사 등을 봐도 알 수 있죠. 공효진은 박지은의 대사를 말할 때에야 진짜 캐릭터가 말하는 느낌을 줍니다.


5.


한편 누가 봐도 윤성호가 썼을 것 같은 장면들에서, 우리는 종종 A급 스타들의 뒷편으로 환영을 봅니다. 어벙한 김수현의 모습 뒤로 종종 임지규가, 차태현의 뒤로는 황제성이 보이고, 아이유 뒤로 박희본이, 공효진 뒤로는 이채은이 보입니다. 더 재밌는 것은 박희본, 이채은, 나수윤, 조한철도 물론 등장한다는 거죠. 하지만 그들은 이전의 '윤성호 월드'에서 맡았던 롤보다 훨씬 비중이 적은 위치에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김수현 같은 특S급 스타가 왜 저기서 저런 역할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건 원래 김수현이 잘할 수 있는 역할도 아니고, 할 필요도 없는 역할입니다.


6. 


혼란스러운 1부에 비해, 2부에서는 윤성호 감독의 색깔이 사라지고 본격적으로 스토리가 진행되어가면서 박지은 특유의 통통튀는 재미가 살아나기 시작하겠죠. 하지만 제가 궁금한 건 오히려, 박지은과 김수현이 없이 차태현 정도의 적당한 스타 1명 정도가 더해진 프로토타입 버전의 [프로듀사]입니다. 윤성호 특유의 엇나가는 개그에 A-급 스타 한 명으로 토요일 12시 이후, 예전 '개그사냥' 정도의 시간대에서 방송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드네요. 아마 방송국은 이 뜻하지 않은 행운에 훨씬 많은 돈을 벌겠지만, 글쎄요,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이 드라마는 큰돈을 들여서 잔뜩 튜닝한 경차처럼 어색하게 느껴지기만 하네요. 경차는 경차 나름대로 타는 맛이 있는데, 돈 들여서 스포츠카처럼 튜닝해지면 이상해지지 않습니까. 딱 그 꼴이에요.


7.


어쨌든 너무 많은 행운이 결국 독이 되어버린 윤성호 감독에게도 심심한 위로를 전합니다. 누구 아시는 분 전해주세요. 저는 한 번도 못 본 사람이라.


* 2017년 3월에 덧붙이는 ps.




<1> 그 이후 박지은 작가는 [푸른 바다의 전설]에서 다소 실망스런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2> 윤성호 감독은 그 이후에도 [출출한 여자] [출중한 여자] 등의 웹드라마를 제작/연출하며 본인의 자리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