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떤 장르건 시작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장르가 한 번 더 진화하게 되는 역할을 하는 이노베이터가 있죠. 시트콤이란 장르의 이노베이터는 <프렌즈>였습니다. 지금은 잊혀진 추억의 이름이 되었지만, 한때 <프렌즈>는 '시트콤'이 아니라 '미드'를 대표하는 고유명사였습니다. 기존의 <코스비 쇼>로 대표되는 가족장르였던 시트콤은 어느새 도시의 청춘남녀와 그들의 일, 사랑을 다루는 장르가 되었습니다. 경전처럼 엄격했던 '시트콤 3원칙'은 <프렌즈>라는 과도기를 거쳐 <섹스 앤 더 시티>로 나아가면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무엇보다 <프렌즈>는 우리에게 '친구처럼 함께 나이 들고 성숙해지는 캐릭터들'이란 경험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2.
<전원일기>는 1980년 10월 21일부터 2002년 12월 29일까지 총 22년간 1088회를 방영했습니다. 시즌으로 따지면 22개를 넘는 엄청난 진행이지만 우리는 복길이의 성장과정을 지켜보진 못했습니다. 복길이는 어느 순간 떠났다가 성인이 되어서 돌아왔을 뿐입니다. 하지만 <프렌즈>는 달랐습니다. 우리는 철없던 챈들러가 결혼하고, 아이를 갖고, 중산층이 되어 모기지론으로 교외의 집을 사고 친구들과 이별하고 본격적인 가정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매주 20분씩 꼬박꼬박 지켜봤습니다. 부모님께 의존하고 치과의사와 결혼해 취집하려던, 아무 것도 모르는 레이첼이 웨이트리스부터 시작해서 랄프 로렌의 중요한 인재로 성공하는 성공 드라마를 10년 동안 지켜보았습니다. 로스가 레이첼을 언제부터 좋아했고, 그녀와 왜 만났다 헤어지고 또 만나게 되는지를 계속 맘 졸이며 지켜보았습니다. 말 그대로 <프렌즈>는 우리의 친구들이었습니다. 매주 한 번씩 20분마다 만나는 친구들이었고, 일방적으로 그들의 이야기만 듣다가 헤어졌지만, 그들은 끝내주게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는 재밌고 멋진 친구들이었고 우린 그것에 불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마침내 모두 자신의 자리를 찾고 중산층이 되어 가족으로 돌아갈 때, 우리는 다시 첫번째 시즌을 정주행하기 시작했고, 파릇파릇한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새삼스레 그들보다 우리가 나이 들었다는 것을 먼저 깨달았습니다. 그들만 나이를 먹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나이를 먹었고, 그들이 성장하는 동안 나는 무엇을 했나를 돌아보게 되었죠.
물론 예외가 존재합니다. 이를테면 <두 남자와 1/2>의 캐릭터들은 전혀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똑같은 머저리짓을 했고, 심지어 귀여운 아기였던 제이크가 또 다른 머저리로 자라나면서 <두 남자와 1/2>이 아니라 그냥 <세 멍청이>가 되었습니다. 시즌을 거듭할수록 쇼는 자극적이 되면서 망가져 갔는데, 문제는 이것이 계속해서 돈을 벌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스튜디오는 이게 얼마나 망가지든 돈을 버는 것을 멈출 생각이 없었고, 마침내 두 남자 중에 한 남자가 떠난 뒤에도 다른 남자를 끌어들여 점점 더 이상한 괴물같은 쇼를 만들어 냈습니다. 후반기 시즌은 끔찍한 재앙의 연속이었죠. <안투라지> 역시 캐릭터들이 성장하지 않는 걸로 유명한 드라마이고, 시즌은 <두 남자와 1/2>의 반밖엔 안 되지만, 에릭을 비롯해 평균치를 내보자면 <두 남자와 1/2>의 캐릭터들보다는 천만 배 이상 성장했을 것 같습니다.
아예 구조를 뒤집어서 주인공의 성장을 방해하는 경우도 있었죠. 누가봐도 <프렌즈>의 영향 아래 출발한 <How I met your mother>가 그렇습니다. 미스터리 떡밥을 뿌려놓고 찾아가는 과정 자체는 시트콤으로써 신선한 출발이었습니다만, 시즌을 거듭할수록 이건 오히려 독으로 작용했습니다. 미스터리의 해결이 곧 쇼의 엔딩이 되는 상황에서 제작진들은 어렵게 인기를 얻은 시리즈를 끝내지 않기 위해 온갖 트릭으로 결말을 뒤로 미뤘으며, 그 과정에서 주인공들은 어리석은 선택을 계속해야 했죠. 자연스럽게 나이들며 성장해가는 대신 그들은 수수께끼 풀이를 위한 꼭두각시처럼 휘청대며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역시 9년이나 계속된 시즌의 결말에서 - 이 별 것 아닌 떡밥 하나만을 가지고, <How I met your mother>의 제작진은 떡밥 수십 개, 아니 수백 개가 난무한 <로스트>보다도 3시즌을 더 끌었습니다. 하지만 그 끝엔 - 거대한 엿을 쇼의 팬들에게 선물해주죠.
3.
아니면 아예 의도적으로 루프물처럼 같은 시간대를 계속 반복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로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에서 발생하는 경우인데, 이를테면 김전일이나 코난 등이 학교를 10년이 넘도록 계속 다니고 있다던지, 하는 설정으로 의도적으로 작품 속의 시간대와 실제 시간대를 일치시키지 않는 경우입니다. 사실 일반적인 드라마의 경우엔 꽤 많지만 시트콤의 경우엔 매년 할로윈,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신년 등 특집 에피소드가 있어서 잘 보이지 않는 스타일이지만, 없는 것은 아닙니다. 대표적으론 시트콤은 아니지만 <심슨 가족>의 경우가 그렇죠. 할로윈 에피소드, 크리스마스 에피소드 등을 빠짐없이 따지지만, 메기는 23년째 아직도 젖먹이입니다. 성장하지 않습니다. 바트 심슨은 계속 같은 학교에서 사고를 치고 있죠.
일반적인 시트콤의 경우엔 배우가 나이가 들기 때문에 이런 경우가 쉽진 않은데, 그래도 <모던 패밀리>나 <커뮤니티> 같은 경우가 비슷합니다. <모던 패밀리>에선 헤일리와 알렉스가 대학을 가고 루크와 매니도 대학에 갈 나이가 되긴 했지만, 그리고 젖먹이였던 릴리도 이젠 학교에 갈 나이가 됐지만, 애초부터 이들 캐릭터의 비중이 크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성장'의 역할이 크지 않고 루프물처럼 같은 시간대를 빙빙 돕니다. 어차피 다 성장해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도 있고, '나이들면서 삶을 배워가는' 것이 주된 내용이 아니라 문화와 세대가 다른 사람들간의 이야기가 갈등의 주된 부분이라 넘어가는 것도 있겠죠.
4.
이제, 저에게 이 이야기를 처음 꺼내게 한 작품을 이야기할 시간이 왔습니다. 바로 열 번째 시즌을 맞이하는 <빅뱅이론>입니다. <빅뱅이론> 역시 저에겐 참 뜻깊은 작품입니다. 역시 첫번째 에피소드부터 매주 빼놓지 않고 찾아보며 쉘든, 레너드, 하워드, 라지와 함께 성장해온 작품이기 때문이죠. 이들을 처음 만난 건 제가 직장생활을 시작한 초창기였고, 보증금 1500만원에 월세 30만원의 집에 자취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그 10년 동안 그들만큼이나 저에게도 굉장히 큰 변화가 벌어졌습니다.
<빅뱅이론>의 캐릭터들의 성장은 천천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레너드는 페니와 결혼했고, 하워드는 결혼해서 아기를 가졌으며, 쉘든도 안정된 릴레이션십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워드는 어머니를 잃고 난 뒤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마침내 최근의 에피소드에선 그들 모두가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졌음을 선언하는 놀라운 사건이 벌어집니다. 넷 모두 코믹콘에 가지 않기로 하는 것이죠.
가족과 연인에게 충실하겠다는 이유로 코믹콘에 불참하는 <빅뱅이론>의 캐릭터들을 보며, 새삼 나도 나이듦을 느꼈습니다. 가끔 어떤 사람들은 나이를 먹으면서도 조금도 자라거나 성장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멈춰있는 것을 봅니다. <두 남자와 1/2>의 인물들처럼 말이죠. 때론 그들의 삶이 더 재밌어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두 남자와 1/2>처럼 억지로 무리하며 만들어낸 에피소드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시트콤의 등장인물들은, 처음 만큼은 아니더라도 때가 되면 재밌고 감동적인 에피소드를 하나씩 뽑아내며 천천히 성장해 나갑니다. 그러다보면 언젠가 <프렌즈>의 결말처럼 자신의 가족과 함께 친구들과 함께 잘 살아나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겠죠.
지금 저도 <빅뱅이론>의 등장인물들과 비슷한 시기에 와있는 것 같습니다. 코믹콘에 불참하기로 한 결정은 1년쯤 빨리 내린 것 같구요. 어쨌든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며 함께 성장하고 있는 친구들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제 인생의 파이널 에피소드도 다른 시트콤들처럼 해피엔딩이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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