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에드워드 즈윅의 <잭 리처: 네버 고백>은 더도 덜도 아닌 전형적인 헐리우드의 액션 스릴러입니다. 군과 연결된 조직의 뻔한 음모가 있고, 그 음모 때문에 몇 명은 죽고 몇 명은 누명을 씁니다. 주인공도 누명을 쓰고 쫓기지만, 내부와 외부엔 그를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의 협력으로 누명도 벗고 진실도 밝혀냅니다. 또 지켜야 할 사람들도 지키죠. 2000년대 초반, 헐리우드 영화가 백 편 넘게 수입되던 시절에 비디오 샵에 가면 액션 코너에서 10편 쯤 비슷한 줄거리를 만날 수 있었던, 예산에 따라 브루스 윌리스, 니콜라스 케이지부터 존 트라볼타와 웨슬리 스나입스, 심지어 찰리쉰도 찍었고, 그 후에는 샤이아 라버프도 몇 편 찍었던 그런 흔한 영화 말입니다.
솔직히 원작 소설의 인기가 높은 것이 그 이유겠지만, 전 이 정도의 중규모 액션 스릴러에 톰 크루즈 같은 S급 배우가 등장해야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더군다나 톰 크루즈는 이미 이던 헌트를 하고 있는데, 잭 리처까지 해야할 이유는 없어보이지만 말이죠. (톰 크루즈가 제작하고 있긴 하지만, 톰 크루즈가 제작하는 액션영화 주연을 꼭 톰 크루즈가 다 해야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물론 <잭 리처>의 원작은 조금 더 하드보일드하긴 합니다. 하지만 짧은 문장으로 쓰여진 책과는 달리 영화의 잭 리처는 훨씬 소프트해 보입니다. 원작의 분위기를 더 잘 살린 건 아무래도 전편이겠죠. 데이비드 맥쿼리의 전편이 좀 어둡고 우울했다면, 에드워드 즈윅의 2편은 낡았지만 훨씬 더 주류 액션영화에 가까워졌습니다. 나름 흥행을 생각한 선택이긴 하겠지만, 그러면서 영화는 너무 무난해졌고, 딱히 짚어서 얘기할 거리는 거의 사라져버렸습니다.
2.
그러니까 여기서는 좀 다른 얘기를 해보죠. 사실 전 이런 류의 영화를 볼 때마다 혼자 조용히 상상해 보는 것이 있습니다; 만약 어떤 이유로 인해 내가 누명을 쓰고 국가기관이나 엄청난 정보력을 지닌 집단에 의해 쫓기게 된다면, 과연 얼마나 피해 다닐 수 있을까 하는 문제요. 정보기관의 디지털 추적장비의 능력을 정확하게 알 순 없지만, 대충 영화나 소설에 등장한 장비들만 가지고도 우리는 그 능력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고, 이런 저런 도피 계획들을 세워볼 수 있을 것입니다.
3.
먼저 제일 우선할 것은 휴대폰과 신용카드를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만 해도, 나름 헐리우드 영화를 통해 디지털 시대의 감시장비와 정보력의 위력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고, 최소한 국가기관에 쫓기게 되는 즉시 휴대전화의 전원을 끄고 신용카드를 쓰지 말아야 한다는 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나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은 그 당연한 사실을 모르고 있거나 대단치 않게 생각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죠. 그 때문에 그들은 종종 다른 등장인물들에게 ‘민폐’를 일으키기도 하고, 관객이나 독자에게 스트레스를 유발시키는 ‘발암’ 캐릭터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잭 리처: 네버 고 백>의 사만다도 그렇습니다. 그녀는 태연하게 휴대폰을 몰래 가지고 있으며 휴대폰을 버렸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심지어 쫓기고 있는 와중에 신용카드를 사용해서 호텔에서 룸서비스를 시키기도 합니다. 덕분에 아주 큰 위기에 빠지게 되죠.
존 그리샴의 <펠리컨 브리프> 초판이 한국에서 출판된 게 1992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무려 25년 전입니다. 그때 이미 정부기관과 관련된 암살자에게 쫓길 때는 ‘신용카드를 쓰면 안 된다’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무려 2017년의 영화에서 거대 군수기업에게 쫓기는 인물이 휴대폰과 신용카드를 저렇게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만약 제가 정부가관에 의해 추격 당한다면, 일단 핸드폰을 끄고 신용카드를 쓰지 말아야 하는데, 사실 이것부터 힘들긴 합니다. 저는 평소에 현금을 가지고 다니지 않거든요. 즉 계좌에 돈도 얼마 없지만, 일단 계좌에 있는 돈을 한 번은 찾아야 할 겁니다. 그것도 지불정지가 되기 전에 찾아야겠죠. 그 순간 제 위치가 한 번 노출될 겁니다.
3.
그 다음의 문제는 도심에 가득한 CCTV입니다. <본 슈프리머시>와 <본 얼티메이텀>에서 본은 CCTV를 통해 실시간으로 추적당합니다.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에서는 CCTV와 인공위성 카메라를 가지고 실시간 추적은 물론, 보이지 않는 각도의 모델링까지 해내는데, 당시에 그 기술을 보고 코웃음을 쳤습니다만, 후에 NSA에서 “영화에 등장하는 감시기술은 대부분 지금의 기술로 실현가능하다”라고 얘기했더군요. 사실 NSA나 트레드스톤 수준의 살벌한 감시 기술까지도 필요없습니다. 같은 동양권의 스릴러인 <골든 슬럼버>를 보면 일본에서도 CCTV만 가지고 한 개인을 얼마나 철저하게 추적할 수 있는지 알 수 있죠.
그렇다면 저는 돈을 현금으로 찾아서 일단 고속버스 터미널로 가서 버스를 타야 할 겁니다. 전산으로 좌석까지 처리되는 기차를 탈 수는 없고, 고속버스를 타고 개발되지 않은 지방으로 도망가야겠죠. 아직 그런 곳에는 CCTV가 조금은 덜 설치되었을 거니까요.
(사실은 그렇지 않지만) 현찰로 꽤 많은 돈을 찾아서 가지고 있다고 하죠. 일단 CCTV 설치가 적은 지방의 여인숙에 가서 숨어서 지낼 순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일단 인터넷 생활이 불가능하죠. 어디서든 제 ID로 접속한다면 당장 저의 위치가 발각될 것입니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같은 걸 할 수도 없을 거구요, 블로그에 글도 업데이트 할 수 없습니다. 뭐 그것까지는 당연한 것이구요.
4.
문제는 그것 이상입니다. 실제로 정부에 추적이 된다면, 정부는 평소 제 컴퓨터를 검사하여 제가 잘 검색하는 키워드, 그리고 도망 중인 제가 검색할 수 있는 키워드들을 확보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즉 불안한 제가 PC방에 가서 로그인을 하지 않고 그냥 단순히 저에 대한 뉴스와 검색어들을 검색해 보기만 해도 그것이 제 위치에 대한 하나의 힌트를 적들에게 흘려줄 수 있다는 거죠. 그리고 공중전화 통화를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무제한적으로 공중전화 감청이 가능해진다면, 음성인식 기술에 의해 특정한 키워드를 대상으로 한 감청 및 녹음이 가능합니다. (테러방지법에 비슷한 조항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즉 가능하면 외부와 연락을 하지도 않고 텔레비전 수상기와 신문 등의 올드 미디어로만 정보를 얻어야 합니다.
5.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막심 샤탕은 <악의 유희>에서 RFID를 이용한 추적기술을 선보입니다. RFID 칩은 요즘 개인의 카드는 물론이고 옷의 태그나 식품 등에도 이용되고 있는데, 이 칩에선 일정한 주파수가 흘러나옵니다. 막심 샤탕은 거리 이곳저곳에 부착된 센서를 통해 이 주파수를 추적하는 것만으로 개인의 행적을 알아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가능한 기술일지는 모르겠습니다. 읽으면서도 사실 상당한 무리가 있어 보인다고 생각했거든요. (막심 샤탕을 아직까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6.
여기까지만 해도 현실적인 장비들이었지만, SF영화에선 그보다 더 강력한 추적 장비들이 등장하죠.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보면, 지하철을 타거나 거리를 걸을 때 무단으로 사람들의 홍체를 스캔합니다. 기껏 그걸 스캔해 놓고 이용한다는 게 거리 광고판의 빅데이터라는 게 좀 애매하긴 하지만요. 처음 태어날 때 자신의 홍체정보 이용 동의서에 서명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것도 나름 피할 방법이 있죠.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세계에선 불법 안구이식 수술이 행해집니다. 자신의 홍체정보를 다른 사람의 것으로 교체하기 위해서겠죠.
7.
생각해보면 할수록 저는 정보기관을 피해서 도망칠 자신이 없어집니다. 아마 제 생각엔 처음에 체크카드로 현금을 찾다가 고속버스를 타기 전 바로 체포되고 말겠죠. 그러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며칠씩 숨어다니면서 끝끝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 마는 건 영화 주인공이니까 가능한 일일 뿐입니다. 심지어 휴대폰을 감추고 신용카드나 써대는 민폐 캐릭터까지 감싸안고서 말이죠.
그러니까 결론은, 그런 세상이 오기 전에 테러방지법 같은 악법을 잘 살펴보고 통과되지 못하게 막았어야 한다는 것이죠. 영화주인공처럼 대단한 능력을 갖고 있지 않으면요. 아, 그러고 보니까 이미 늦은 일이군요. 어쩔 수 없죠. 영화를 볼 때마다 혹시 다른 방법은 없을까 조금 더 생각해보고 사는 수밖에. 사람들이 평소에 투표할 때도 그만큼 생각하면서 살면 더 좋겠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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