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더 킹>의 영화적 야심은 대단합니다. 별 볼 일 없는 한 젊은이가 대한민국의 타락한 권력의 중심에 들어가 활약하다가, 몰락하고 참회하며 복수하는 이야기를 그려내면서, 이 썩은 권력들이 어떻게 작동하고 세상을 움직이는지를 스케치하듯 그려내 보여주겠다는 것이죠. 약 2시간 30분 정도에 말이죠. 하지만 세상만사가 그렇듯 야심이 크면 클수록 그것을 실현하기는 힘든 법입니다. 때론 자신의 능력에 맞지 않는 야심을 가진 사람도 있는 법이구요. 개인적으로 저는 한재림 감독은 후자 쪽이라고 보는 편입니다. <더 킹>은 그의 능력에 비해 너무 큰 야심을 가지고 만든 영화 같습니다.
2.
다루고자 하는 내용이 많고 깊으니, 초반의 영화는 내레이션의 힘을 빌려 겉핥기식으로 빠르게 내달립니다. 때문에 영화는 중반까지 한 시간 반짜리 몽타주처럼 보입니다. 더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출발, 비디오 여행'에서 보여주는 간추린 줄거리 소개 같습니다. 애들을 패고 다니는 불량 학생은 갑자기 아버지가 검사에게 혼나는 것을 보고 검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비약1) 공부를 열심히 하려는데, 당연히 공부가 안 됩니다. 그러다가 자기는 원래 시끄러운 데서 공부가 잘 되는 체질이라는 것을 아주 우연히 발견합니다.(비약2) 남들처럼 별로 노력하지도 않고 시험삼아 사법고시를 봤는데 붙어버립니다. (비약3) 정의롭게 살려고 했는데, 갑자기 정우성의 일장 연설을 듣게 되고 마음을 바꿔 권력에 빌붙기로 합니다. (비약4)
주인공의 인생에 가장 큰 결정을 해야 하는 4가지 고비를, 우연처럼, 스케치처럼, 별다른 갈등 없이, 지난 줄거리 소개하듯 휙- 하고 내레이션으로 보여줍니다. 여기엔 어떠한 계기나 사건도 없습니다. 주인공의 갈등은 조인성의 어설픈 딕션의 내레이션으로만 나타납니다. 문제는 그렇게 후루룩 지나가는 데도 생각보다 길고 지루합니다.
3.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 말이 많은데, 어떤 비판은 타당하며 어떤 부분은 억울한 면도 있습니다. 물론 정우성 조인성이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지 못한 것은 맞지만, 동시에 등장인물들이 갈등이나 성장이 대본 내에 전혀 녹아들지 못하고 피상적인 연기만을 보여줘야 하는 각본에서 대단한 연기를 기대하는 것도 어불성설입니다. 물론 그런 대본을 갖다 줘도 잘하는 배우들이 있습니다. 하정우가 "정치인이란 말이야, 반드시 당한 것에는 보복을 해야 한다. 이게 아주 복잡한 정치 엔지니어링의 철학이거든"이란 대사를 읊었다면 훨씬 그럴 듯하게 읊었을 순 있겠죠. 그런데 (서장훈의 말처럼)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어차피 저 대사 자체가 엉망인데.
물론 정우성이어서 망한 장면들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정우성이 술에 취해 "내가 역사 강의 해야 돼?"하며 자신의 꼰대 철학을 강연하는 장면. 안 그래도 설득 되기 힘든 논리인데, 정우성처럼 어설프게 말하면, 나쁜 짓 하고 싶다가도 "아 착하게 살아야 되겠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엉망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 장면은 정우성보다도 OK를 내 준 감독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며칠이고 반복해서 찍었으면 절대로 그 정도의 연기가 최종 편집본에 들어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반면 정우성이어서 좋은 장면들도 물론 있습니다. 저는 그 때문에 정우성의 캐스팅이 반드시 에러라고만은 생각하지 않는데요. 정우성이 가라오케 스타일로 마이크 잡고 놀거나, 클론의 춤을 추면서 노는 장면은 정우성이었기 때문에 좋았습니다. 아무래도 좀 현실적인 느낌이 들었으면 그냥 일반인들의 가라오케 장면처럼 보였을텐데, 정우성과 조인성이 클론의 군무를 맞춰서 추는 장면은 비현실적으로 보여서, 오히려 '저런 비현실적인 인물들이 노는 모습'의 구차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더 킹>의 연출의도 자체가 리얼리즘 보다 특정한 이미지나 느낌을 상징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었다면 나쁘지 않은 캐스팅일 수 있었습니다.
4.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장 완벽하게 해낸 것은 당연히 안희연 검사 역할의 김소진 배우입니다. 첫 등장부터 정의로운 검사처럼 느껴지는 완벽한 이미지 아이콘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더러, 귀에 콱 박히는 사투리 연기로 독특한 리얼리즘까지 보여주며, 등장한 모든 배우를 잡아먹어 버립니다. 정우성, 조인성, 배성우는 물론이고 한 편 이상의 단독 주연작을 가진 여배우들 - 김아중, 정은채, 고아성, 황승언, 더 넓게 보면 이주연까지 - 이 이 영화에서 얼마나 처참하게 낭비되고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실로 대단한 연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원래 모델이 된 인물이 사투리를 쓴다는 설정도 있지만, 김소진 배우의 사투리는 그 연기하기 어렵다는 - 문소리 배우가 '하하하'에서 선보여서 극찬을 받은 바 있는 - '서울말인 척 하는 사투리'입니다. 묘하게 억양은 남아있는데 단어는 서울말을 쓰죠. 안희연 검사 역시 상징화 되고 아이콘화 되어버린 전형적인 인물이지만, 사투리를 비롯한 김소진 배우의 빼어난 연기로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리얼리즘의 캐릭터가 됩니다. (물론 최근들어 가뜩이나 여배우들의 역할이 부족하기 때문인지, 조연급에서 씬스틸러로 눈에 띄는 연기를 하는 여배우들은 사투리 연기를 하고 있는 경우가 좀 있더군요. 최근엔 <비밀은 없다>의 최유화 배우가 그랬습니다)
5.
한재림 감독의 연출작은 4편입니다. 저는 그 중에 <연애의 목적>과 <관상>은 재밌게 봤고, <우아한 세계>와 <더 킹>은 별로였습니다. 명확하게 갈라지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연애의 목적>과 <관상>의 각본은 한재림 감독이 쓴 것도 아닐 뿐더러, 각본 자체가 너무 유명한 케이스입니다. (심지어 정확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연애의 목적>의 경우 한재림 감독의 데뷔가 1+1이었다는 루머도 있었습니다. 고윤희 작가가 대본을 팔 때 한재림 감독의 데뷔까지 같이 딜했다는 얘기였죠) <관상>의 각본은 공모전 수상작으로 영화화되기 전부터 엄청나게 기대작이었구요.
반면 <우아한 세계>는 <소프라노스>의 어설픈 번안에 가깝습니다.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저는 굉장히 늘어지는 번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지적했다시피 <더 킹>은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한국 정치판 번안입니다. 하지만 마틴 스콜세지는 자기가 직접 각본을 쓰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따지고 보면 아직 한재림 감독은 자신의 오리지널 이야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어쩌다보니 영화판에 들락날락 하면서 한재림 감독이 이전에 작업하던 웹툰 원작 <트레이스>의 시놉시스를 접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디벨로핑이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본 건 역시 <트레이스>가 아니라 <본 아이덴티티>의 한국판 번안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한국의 남자 감독들이 시놉을 워낙 못 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경향인데(고백하자면 저도 시놉은 잘 못 씁니다) 한재림 감독은 좀 그 중에서도 특출날 정도로 못 쓰더군요. (여담인데, 시놉은 드라마 하는 여자 작가들이 진짜 잘 씁니다) 영화를 4편이나 만든 감독이고, 나름 4편의 영화 모두 연출력으로는 어디 가서 빠지는 편이 아닌 감독인데, 시놉 좀 대충 썼다고 뭐라 하면 안 되겠지만 어쨌든 <더 킹>도 본인의 영화적 야심을 이루기 위해서 각본은 조금 더 신경 써서 다른 작가에게 맡겼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6.
다른 사람들처럼 저 역시도 <더 킹>에 대한 기대가 굉장히 컸습니다. 개봉 당시 정치적 상황이 굉장히 잘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만 탄력을 받았으면 또 한 번 큰 흥행을 기록할 수 있는 영화였죠. 저 역시도 비슷한 이야기를 기획해서 한 곳에 제출한 상태였기 때문에 <더 킹>의 흥행이 필요하기도 했습니다. 아무래도 <더 킹>이 성공하면 투자가 좀 더 쉬워질테니까요. (근데 막상 나와놓고 보니, 주제와 결말이 너무 똑같아서 결국 아류처럼 보일 수밖에 없긴 하더군요. 그 회사에선 지금 연락이 없습니다)
이게 좀 문제인 게, 이렇게 시기까지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면(그것도 영화판 전체의 불황이 아니라 경쟁작하고 붙어서 나가떨어지면), 이후에 비슷한 소재를 시도하는 것은 점점 더 힘들어 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색적인 시도를 한 <더 킹>의 실패는 또 한 번 뼈아프게 받아들여집니다. 이후 <1987>이나 <특별시민>처럼 조금은 무겁게 접근한 영화들은 어떤 결과를 받아들지, 신경써서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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