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뜬금없지만 <패신저스>를 이야기하는 것은 꼰대스러운 한탄으로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요즘 친구들은 정말 책을 - 정확히는 소설을 - 안 읽는군요. 비단 한국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그런 것 같습니다. 어차피 문학이 힘을 잃은 것은 좀 오래된 일이긴 합니다. 그렇다고 "책을 안 읽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펄쩍 뛸 사람들도 꽤 많죠. 아직 자기계발서는 수십만 부, 수백만 부가 나가기도 합니다. 저는 자기계발서를 저주하는 사람입니다만, 솔직히 차유람이랑 결혼한 그 양반은 조금 부럽기도 합니다. '혼전순결'을 서약 했던 미녀를 '혼전임신' 시킬 정도의 능력이라면, 사실 뭘해도 될 사람이긴 했을 겁니다. 그래서 자기계발서는 여전히 쓰레기라고 생각하지만, 자기계발서를 집필하는 사람들의 능력만은 존경하는 방향으로 생각을 바꿨습니다.
뭐, 그건 좀 다른 얘기고.
꼰대같은 얘기를 반복해서 하겠습니다. 그럼 자기계발서 말고 요즘 애들은 소설 같은 건 안 읽나봐? 우리 땐 조정래, 이문열, 신경숙, 은희경 이런 소설들이 베스트셀러였는데. 그럼 또 펄쩍 뛸 젊은이들이 많죠. 요즘도 정유정이나 하루키 정도는 다들 앞다투어 읽습니다. 그리고 사실 요즘 친구들이 소설을 안 읽는 것도 아닙니다. 죄다 웹소설이나 라노베를 읽을 뿐입니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경향은 비단 우리나라나 동양권에만 한정된 것도 아닙니다. 서양도 똑같이 틴에이저는 환타지에 그리고 그 이후의 친구들은 영어덜트 소설에 빠져 있고, 조금 더 나이가 들면 칙릿 정도를 읽을 뿐입니다. 헐리우드에서 소설을 영화화한다면? 그 대부분은 영어덜트 아니면 칙릿에 속하는 작품일 것입니다.
2.
칙릿은 처음엔 그저 사회에서 젊은 2,30대 여성들의 일과 사랑을 그리는 장르였습니다. 지금도 대부분의 작품은 그렇죠.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 하나의 단일한 종(種)이 번성하게 되면, 이 종은 생존을 위해 변이를 하기도 하고, 혼성교배를 하기도 합니다. 칙릿은 <섹스 앤 더 시티> 열풍과 함께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 번성하기 시작했고, 결국 그 번성의 결과로 변이와 혼성교배를 시작했습니다.
<나를 찾아줘>나 <걸 온 더 브릿지> 또는 <허스밴드 시크릿>은 미스터리 장르와 교배한 칙릿입니다. 미스터리적인 구성은 약해졌지만, 여성화자 특유의 섬세한 감성으로 사건을 구성하고 이끌어 나갑니다. 심각한 폭력과 살인 등의 사건을 다루지만, 칙릿처럼 가볍고 경쾌한 톤으로 내러티브를 진행시키죠.
<헝거게임>은 영어덜트 판타지와 결합한 칙릿입니다. 이야기는 독재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와 또래의 소년/소녀들을 잔인하게 죽여야 하는 서바이벌 배틀로얄을 주 소재로 하지만, 생존방식만큼 중요한 것이 경기에 나가기 전에 받는 메이크업이라고 이야기하고, 무뚝뚝하지만 오래전부터 진심을 다해 자기를 위해주는 동네 소꿉친구와 혜성처럼 나타나 자기를 구해준 남자 사이에서 삼각관계에 빠져 고민하는 소녀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소녀는 영웅이자 혁명군인 동시에 아이돌이며 슈퍼스타입니다. 마침내 이 소녀는 독재자를 물리치는 영웅이 됩니다만, 여전히 현실인식은 그닥 깊어보이지 않습니다. 캣니스는 처음 게임에 참여하는 선택부터 우발적이었고, 자신의 일(?)과 사랑에 치이며 결국 그 위치까지 올라가게 되었을 뿐입니다.
이후에 칙릿은 이번엔 SM포르노와 결합하여 또 한 번 큰 성공을 거둡니다. 여러분들이 다 아시는 <그레이와 50개의 그림자>가 그것이죠.
3.
많은 사람들이 <패신저스>를 보고 실망하는 이유는, 홍보사에서 이 영화를 마치 SF미스터리 장르처럼 홍보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반응은 "SF인 줄 알고 보러갔는데, 사랑영화였다"라는 것이죠. 근데 사실 이것도 제대로 된 대답은 아닙니다. 이 영화를 이해하는 데는 더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앞의 설명을 뒤집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영화는 미스터리/판타지와 성공적으로 교배에 성공한 칙릿이 마침내 SF장르를 잡아먹기 시작한 영화라는 것이죠. 즉 그동안 '남성화된 장르'로 여겨지고, 하드한 설정과 이야기들이 넘쳐난 미스터리와 SF가 여성성과 소프트함을 받아들이는 단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4.
칙릿답게 이 영화의 줄거리는 여성판타지의 대표격인 동화를 뒤집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예를 들자면 <백설공주>와 <잠자는 숲속의 미녀> 같은 동화는 잠자는 공주와 사랑에 빠진 왕자가 키스를 하고 공주를 깨우는 것으로 결말을 맺습니다. <패신저스>는 정확히 거기서 시작합니다. 왕자는 자기 혼자서 사랑에 빠지고 잠들어 있는 공주를 깨웁니다. 둘은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주는 왕자가 감추고 있던 비밀을 알게 되고 둘 사이엔 갈등이 생깁니다. 하지만 그 갈등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합니다. 갑자기 나타난 마법사가 - 사실은 깨어난 승무원이 - 이 세상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이죠. 왕자는 공주와 다른 5000명의 백성들 - 아니 승객들(passengers) - 을 구하기 위해 갑옷(아니 우주복)을 입고 방패를 들고, 길을 떠납니다. 왕자는 결국 공주와 승객들을 구해내고 자신을 희생합니다. 하지만 공주가 다시 왕자를 구해냅니다.
도식화 해놓고 보면 굉장히 간단한 동화입니다. 하긴 롤랑 바르트가 모든 이야기에는 원형이 있다고 했으니 그게 큰 문제는 아니죠. 하지만 이 영화는 거기서 발생되는 여러 가지 가치 판단이나 질문들까지 동화처럼 간편하게 처리합니다. 일단 오로라를 깨우는 문제가 그렇죠. 이 영화에서 딱 한 번 이 문제가 진지하고 정확하게 다뤄지는데, 크리스 프랫이 자신을 의도적으로 깨운 것이라는 걸 알게 된 제니퍼 로렌스가 로렌스 피쉬번에게 "그건 살인과도 같은 일이에요. 그렇지 않나요?"라고 질문할 때입니다. 하지만 로렌스 피쉬번은 어이없는 대답을 하죠; "옳은 일은 아니지만, 이해는 갑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세상에 이해 못할 일 따위는 별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저도 그렇게 대답한 게 이해는 갑니다. 지금 당장 세계의 멸망을 해결해야 하는 입장에서 니 목숨처럼 하찮은 문제에 매달려 있을 시간이 없다는 뜻이겠죠.
5.
갈등은 세계의 멸망이라는 거대한 위기 앞에서 눈녹듯 사라집니다. 그리고 둘은 위기를 극복하고 난 후 오래 오래 행복하게 - 하지만 88년은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가꾸며 살았답니다.
<패신저스>의 각본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헐리우드에서 영화화되지 않은 각본 중에 가장 기대되는 이야기를 정리해 놓은 리스트 - 이런 게 수십 년 전부터 헐리우드에서는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 '블랙리스트'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요즘 말하기엔 좀 예민한 명칭이죠? - 의 제일 위에 꼽힐 정도로 기대하는 각본이었다고 하고, 크리스 프랫은 이 각본을 너무 좋아해서 "스크립트를 바꾸면 출연하지 않겠다"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제가 생각할 땐 아무리 봐도 그 정도는 아닙니다.
6.
오히려 저는 오로라 레인이 깨어나기 전에 크리스 프랫 혼자서 우주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벌이는 낡은 코미디 부분이 좋았습니다. 감독이 얌전한 편이라 그냥 옷 벗고 나체로 우주선을 돌아다니는 선에서 끝냈는데, 조금 더 센 수준의 장면이 나왔더라도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제니퍼 로렌스의 서비스 컷들이 꽤 많이 나옵니다. 흰색 모노키니는 참 소화하기 힘든 수영복인데 잘 어울리는 걸 감독도 느꼈는지 수영할 때마다 그 수영복만 입고 합니다. (여자들은 보통 수영복 여러 벌을 들고 다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잘 때는 실크로 된 슬립을 입고 잡니다. 우주선에서 그렇게 가슴이 강조된 옷들을 계속 입고 다닐 필요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참 이건 칙릿이었군요. 하긴 <헝거게임>을 보면 서로 죽이는 전투를 하러 나가면서도 디자이너가 골라준 옷과 1급 아티스트의 헤어 메이크업을 받고 나가더군요.
ps.
(이하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난 뒤 크리스 프랫은 제니퍼 로렌스를 다시 동면시킬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합니다. 단 둘 다 잠들 수는 없고, 크리스 프랫은 자신이 저지른 일이니 제니퍼 로렌스를 다시 동면에 들어가게 해주겠다고 제안합니다.
그 순간, "제니퍼 로렌스가 잠들고 나면, 다른 여자를 깨워서 1년 동안 사귀다가 또 잠들게 하고, 또 다른 여자를 깨워서 1년 동안 사귀고 잠들게 하고... 이걸 계속 반복하면 되겠네?"라는 생각이 머리 속에 들었다면, 제가 너무 쓰레기인가요?
'REVIEW >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잭 리처: 네버 고 백> - 정보기관의 추적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0) | 2017.03.13 |
---|---|
<더 킹>에 대한 몇 가지 잡담 (0) | 2017.03.12 |
<달콤, 살벌한 연인> -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찝찝한 문제 (0) | 2017.03.07 |
<다크나이트> - 되고 싶은 사람이 된다는 것 (0) | 2017.03.07 |
<나이트 크롤러>에 대한 몇 가지 잡담 (0) | 2017.03.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