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REVIEW/영화

<다크나이트> - 되고 싶은 사람이 된다는 것

by 이어원 2017. 3. 7.

* 2008년 9월에 쓴 글입니다.



1.


스무 , 나는 냉정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어떤 일이든 합리적인 판단을 하며, 옳지 못한 일과 맞닥뜨리면 그것을 저지른 사람이 부모라도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너의 잘못이다, 라고 말할 있는 사람. 철저하게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서만 지배되는 사람. 그리고러한 나를 이해해주고 지지해주는 소녀를 동반자로 삼기를 소원했으며, 그리하여 서른 되면 나는 이상 사람으로 상처받지 아니하는, 강철같은 내면을 가진 이로 성장하기를 바랐다

스물 살에 좋아했던 여자아이는 그런 소년같은 나를 비웃었고, 스물넷에 나는 마침내 되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서른 하나가 지금도, 여자의 작은 행동 하나에 크게 상처받는 철없는 남자일 뿐이다. 가끔은 일흔이 되어도 경로당에 놀러온 여사가 잘난 하는 영감의 장기 솜씨에 감탄하는 모습을 뒤에서 흘겨 보면서 질투하는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을까, 걱정되기까지 한다. 아마"  장기는 야비해"라고 투덜거리며 영감을 깎아내리겠지만 여사는 놈을 두둔하려 할테고, 나는 여사가 얘기를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을 발견하고   상처받겠지. 나이를 먹는 것이 정신적인 성장과 비례하지 아니하며, 인생에서 무엇을 이루었든 성취와 상관없이 일흔 먹은 소년이 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라고 상상할 있다. 일흔 먹은 질투심 투성이의 예민한 소년이란, 괴물일 뿐이다. 아무도 그런 것이 되고 싶진 않았을 것이고, 아마 그에게도 되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것이란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의<다크 나이트> 바로 '되고 싶었던 사람이 되지 못했던'배트맨에 대한 거대하고 위대한 드라마이다


2. 


버튼의<배트맨>시리즈가 현실을 지워버린 , 고뇌하는 배트맨의 존재론적 고민을 동화적이고 만화적인 세트디자인 속에서 풀어냈다면, 크리스토퍼 놀란은 외려 비현실적인 인물들을 사실적인 메트로폴리스 안으로 불러들인다


<
배트맨 비긴즈>이전까지, 우리는 고담시가 그토록 찬란한 자연광이 비추는 도시라고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그나마<배트맨 비긴즈>에서 묘사된 고담은 도시를 가로지르는 모노레일 덕분에 근미래적인 느낌을 주며, 약간은 비현실적으로 보여졌었다. 하지만 실제로 대부분을 시카고(놀랍게도 뉴욕이 아니다)에서 로케이션으로 찍은<다크 나이트> 고담은 그냥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거대한 대도시이다. 그리고 은행을 털고, 병원을 폭파하는 조커의 방식 역시 그냥 현실세계의 테러리즘과 별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
배트맨>에서 보라색 양복을 입고 과장스럽게 시가지 퍼레이드를 벌이며 돈을 뿌려대던 조커와 비교해 보라) 얼핏 보면 조커는<다이 하드> 비롯한 수많은 하이 재킹 무비에 나오는 냉혹한 사이코패스 테러리스트 같고, 배트맨을 그것을 저지하려고 죽도록 고생하는 브루스 윌리스처럼 보인다


조커나 배트맨이나 외려 가면과 코스튬이 어색해 보일 지경인데, 그것들이 놀랍도록 커버되고 있는 것은 액션과 드라마가 거의 등속도로 진행되면서도 놀라운 조화와 타이밍을 이루고 있는 각본과, 시침 떼고 가지의 불균질한 톤을 완벽하게 컨트롤하는 연출, 그리고 무엇보다도 절대 불가능해 보이는 역할들을 소화해낸 배우들 덕분이다. 이들은 복잡하고 고차원적인 갈등을 지니고 있는 독창적인 인물들을 연기하면서, 동시에 코믹스의 팬들이 가지고 있는 원작의 인물들과 멀어져서는 된다는 불가능한 미션을 가지고 카메라 앞에 섰다. 사람들이"배트맨은 가면을 햄릿"이라고 평할만큼 복잡한 갈등을 연기하는, 코믹스 속의 명쾌한 캐릭터들. 히스 레저 아니라 크리스천 베일, 게리 올드만, 아론 에크하트까지. 배트맨과 조커의 이름만이 포스터에 박히지 않은 것이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이니,<다크 나이트> 배우들의 열연이 돋보이는 앙상블 드라마라 해도 충분할 것이다


3. 

버튼의 배트맨과 차별되는 하나의 지점 역시 바로  '현실성'이라는 것에서 발생한다. 버튼의 배트맨은 결국 부모 살해라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그리고 조커라는 인물의 탄생에 대한 원죄적 갈등만을 가졌다. 하지만 놀란의 배트맨은 조금 사회적인 면에 관심을 가진다. 그에게 목표는 고담 시에서 '갱단'이라는'현실적인 ' 제거하는 것이다. 조커가 '최강의 '이긴 하지만, 그건 만화 속에서의 일이고,<다크 나이트>에서 현실세계를 지배하며 심지어 경찰과 검찰에까지 손을 뻗고 있는'강력한 ' 갱단이다. 배트맨이 최종적으로 목표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뿌리 깊은 ' 합법적이고 구조적인 제거이며, 안타깝게도 그것은 일개 자경단인 배트맨이 밤에 조무래기 명을 붙잡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물론 조커를 붙잡는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악에 대한 합법적이고 구조적인 소멸, 배트맨이 소망하는 것은 그것이며, 소망의 현은'마침내 배트맨이 필요없어지는 '이라는 명제로 구체화된다. 올바른 집행에 의해 사회적인 악이 제거될 , 배트맨을 비롯한 자경단의 역할은 소멸되고, 아이러니하게도'배트맨' 브루스 웨인은 그렇게 '배트맨'이라는 자신의 존재가 소멸되는 날을 기다린다. 그리하여 실제로 그는 하비 덴트와의 식사 자리에서'그런 자경단이 법률과 상관없이 설치고 다니는 '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4.

 
사회적인 악에 대한, 합법적이고 구조적인 소멸. 브루스 웨인이 소망하는 일이지만, 배트맨은 그런 것을 없다그는 자경단이며, 자경단은 결론적으로 범법자일 뿐이다. (실제로 그래픽 노블에서 쓰인'자경단vigilnate'이란 단어를 <다크 나이트> 의도적으로'무법자'라고 번역한다) 그것은 브루스 웨인이'되고 싶었던'인물이 아니다. 그가 되고 싶었던 인물은, 악의 합법적이고 구조적인 소멸을 가져올 있는'현실세계의 영웅'이다. 배트맨 따위는 사라지고, 그런 인물이 지키는 세계를 바라는 브루스 웨인은 현실세계에서 자신의 욕망을 투영할 있는 인물을 발견한다


그가 누구냐고? 당연히 하비 덴트다

5. 

현실세계의 정의를 가져올 있는 합법적인 권력과 능력과 정신(spirit) 가지고 있는 인물, 강철같은 내면의 소유자 하비 덴트는, 백만장자이되 비싼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과 가면 쓰고 코스튬을 입고 박쥐 흉내를 내는 것밖에   모르는, 철없는 소년 브루스 웨인이'되고 싶었던'사람이다. 그리고 심지어 브루스 웨인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자의'현실의''진짜'(real) 연인이기까지 하다. 대놓고 르네 지라르의'삼각형의 욕망'이론을 연상시키는 설정 속에서 브루스 웨인은, 마디로, 찌질댄다. 러시아 발레리나를 대동하고 둘의 데이트 자리에 찾아와서 끼어들고, 자신의 금력을 자랑하며 후원회를 만들어 주겠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하비 덴트에게 자신을 투영시키는데, 그것은 마침내 드라마의 결론에서 하비 덴트의 타락을 끝끝내 인정하지 않고,'진짜 영웅' 퇴색되어서는 된다며 배트맨에게 모든 잘못을 뒤집어 씌우기까지 한다. 그것은 정의를 아직도 믿고 있는 고담 시민과는 상관없다. (사실'평범한 고담시민' 과연 영화에서 명이나 등장하는가? 유람선 폭파 장면 정도? 그나마 죄수들의 대칭축이었다) 그것은 하비 덴트의 타락이 브루스 웨인이 꿈꾸던 이상의 타락이기도 했기 때문일 것이다


6.


여담인데, 브루스 웨인이 러시아 발레리나를 끼고 데이트에 끼어드는 장면에선 왕원화의<단백질소녀>, (화자의 친구가 화자의 데이트를 거절하는 여자에 대한 복수를 위해서자신이'서기' 알고 있는데, 서기를 데리고 그녀 앞에 나타나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한다) 알프레드가 레이첼의 편지를 태워버리는 장면에선 아다치 미츠루의<쇼트 프로그램> 연상되더라

 

7.

 

하비 덴트같은 인물이 되고 싶었으나, 결국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철없는 백만장자 코스튬 집착 변태 소년으로 자라고야 브루스 웨인은 하비 덴트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영시켜서라도 그를'자신이 되고 싶었던 인물' 만들려고 한다. 하지만 우린 알고 있다. 사람이 현실에서'되고 싶었던 인물' 된다는 얼마나 힘든 일인지. 설사 간접적으로나마 실현시키는 것이라도 말이다.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의사, 판사, 검사가 되어 떵떵거리고 사는 자신의 꿈을 아이들에게 투영했고, 얼마나 많은 자식들이 기대를 배신하고 양아치의 길로 접어들었는가, 생각해 보란 말이다


8.

 
버튼의<배트맨>에선, 조커는 배트맨을 창조하고, 배트맨은 조커를 창조하는 원형의 순환구조를 가진다. 반면<다크 나이트>에서 조커는 원래부터 스스로 존재하고 있었다많은 사람들이 조커를'카오스(혼돈)' 비유하는데, 성경  장을 펴봐라. 창세기 1장에 나오지 않는가. 태초엔 사람도 없었고, 지구도 없었고 오로지 혼돈만이 있었고, 하나님만 수면으로 쭐래쭐래 운행하였노라고


원래부터 존재하던 조커는, 하비 덴트를 타락시킴으로써 배트맨의 욕망까지 함께 짓밟는다. "판검사 되라고 굶어도 학원에 과외에 열심히 공부시켜놨더니 어디서 여우 같은 기집애가 혼을 빼놔서 애가 그날부터 공부는  하고..." 시작되는 부모들의 탄식을 생각해 보면, 그보다 꿈도 훨씬 컸고(대부분의 부모는' 먹고 살고 떵떵거리며 살기' 바랄 뿐이지. 어떤 부모도 자식들에게 "네가  다음에 검사 되어서 고담 시의 악을 청소하여라"라는 어려운 미션은 내려주지 않는다) 들인 돈도 훨씬 많은 브루스 웨인의 절망은 얼마나 것이었을까.<다크나이트> 등장하는 전통적인 배트맨 코믹스의 악당의 역할에서 많이 벗어나 있고, 영화 내에서 벌어지는 엄청난 죄악들에 비하면 작고 초라한 개의 (그것도 복수라는 이유로 정상참작이 가능한) 살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트맨이 그의 타락을 엄청난 범죄처럼 취급하고 있는 것은 그가 짊어져야 했던 것이 자신의 그만큼 커다란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이성계의 위인전을 보면서 그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자란 소년이, 사실은 그가 땅에 최초의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의  충격과 혼돈은 얼마나 것인가

9.


이성계가 적절한 예가 아니라는 것은 인정한다. 좋은 예를 들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이름들이 현실 세계에서 발휘하는 영향력과 발생시킬 문제들이 너무 같았다


이건 그냥 코믹스를 원작으로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대한 너스레일 뿐이다


10.

 
<
다크 나이트> 엔딩을 해피엔딩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편리하지만, 다소 기괴한 타협을 제안한다. 투페이스가 살아남아 계속해서 여러 가지 악행을 벌이는 원작과는 전혀 다른 결론을 내려버리는 것이다. 고담 시의 대부분의 시민들은 투페이스라는 이름을 모를 것이고


하비 덴트는 정의로운 지방검사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진실을 알고 있는 브루스 웨인조차 그렇게 자신의 기억을 조작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에게 하비 덴트는 타락해선 되는 이름이었으므로

 

11.

 
되고 싶었던 인물이 정말 된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그리하여 하고 싶었던 일들을 정말로 이룬다는 것도 얼마나 힘든 일인가. 정말로 함께 하고 싶었던 여자와 함께 한다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스무 살에 그려왔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는 살아가고 있고, 내가 어렸을  하고 싶었던 일들도 주식으로 대박내서 만져보는  따위가 아니었을텐데.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야기한다. 그것은 너한테만 힘든 일이 아니라고. 배트맨도 사실은 알고 보면 불쌍한 놈이라고. 세상을 가진 비싼 장난감들을 가지고 놀고 있지만, 알고 보면 정말 좋아하는 여자한테 질대는 너희와 똑같은 놈이라고


12.


그리하여 - 우린 가끔 정말 배트맨의 방식대로 타협하고 산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을 하고 싶었던 일이라고 믿고, 내가 정말 남은 인생을 함께 하고 싶었던 여자는, 스무 나를 차버리고 지금은 다른 남자랑 결혼해 애까지 낳고 살고 있는 다예 엄마가 아니라 곁에 있는 아이라고 믿으며, 결국 높은 연봉을 얻고 주식 대박내서 돈을 많이 벌면, 언젠가는 그때 하고 싶었던 일을 하면서 있지 않겠느냐고. 아직 하비 덴트는 타락하지 않았다고. 분명 레이첼은 죽기 전에 나와 결혼하겠다고 결심했을 것이라고. 아아 자연광이 내리쬐는 고담과 너무도 닮은 도시에서 말이다

 

ps. 그러고 보니,<배트맨 리턴즈>에선 펭귄이 시장에 당선됐었지? 우리도 하수도에 사는 비슷한 당선시키지 않았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