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이크 질렌할이 출연하는 '나이트크롤러'에 대한 글을 쓸 때, 가장 쉬운 방법은 1994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케빈 카터의 '수단의 굶주린 소녀' - 일명 '독수리와 소녀'라는 제목으로 더 잘 알려진 - 라는 사진작품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영화가 옐로 저널리즘으로 지칭되는, 미국의 자극적인 뉴스 채널과 그 채널에 부역하는 사설 통신사들을 비판함으로써 언론의 취재윤리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라고 알아채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실제로 영화는 직접적으로 취재윤리에 대해 여러 번 언급하지요. 그리고 이런 식의 저널리즘 취재윤리를 이야기하기에 케빈 카터만큼 좋은 소재가 어디 있겠습니까.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지만, 케빈 카터는 수단의 식량배급소로 가는 도중 굶주려서 쓰러져 있는 소녀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서 그녀를 잡아먹기 위해 소녀 뒤에 앉아있는 독수리도 함께 보게 되죠. 여기까지는 일치하는 이야기입니다만, 그 이후의 세부적인 사정은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마다 약간씩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그 독수리가 소녀가 죽으면 시체를 먹기 위해 지켜보고 있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독수리가 힘없는 소녀를 공격하기 위해 준비하는 도중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어쨌든 그 긴장감 넘치는 순간을, 케빈 카터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고, 이런 저런 고민을 하며 그 주위를 맴돌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주장이 존재합니다. 케빈 카터가 바로 사진을 찍은 후 독수리를 쫓아버렸다는 이야기도 있고, 어떤 사람은 20분이나 주변을 맴돌면서 사진을 찍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케빈 카터카 사진을 찍고 난 후 독수리를 쫓아버렸다고 하고, 누구는 당시 수단의 취재기자들은 전염 위험 때문에 기근 희생자들을 만지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를 구하기는 힘들었다, 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중요한 사실은, 케빈 카터가 아이를 구하기 전에 그 장면의 사진을 먼저 찍었다는 사실입니다.
당연히 이 사진은 유명해졌고, 아프리카의 기근을 알리는 것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퓰리처상까지 수상하게 되었죠. 하지만 동시에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왜 소녀를 바로 구하지 않고 사진을 찍었는가"라며 카터를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케빈 카터는 비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33세의 나이로 자살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확실치는 않습니다만) 그의 마지막 메모에는 '어린 아이에게 물을 주어야 할 것인가, 사진을 먼저 찍어야 할 것인가...'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까지는 '서프라이즈'식 이야기 결말이고, 사실 케빈 카터에 대해서는 다르게 전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쪽이 신뢰도가 훨씬 높습니다) 덜 극적이긴 하지만, 케빈 카터는 이미 퓰리처상을 받기 전부터 - 정확히는 수단을 찾기 전부터 - 이혼과 생활고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렇게 생활이 망가져 있던 케빈 카터는 친구 조아오를 따라 무언가 돌파구를 찾기 위해 수단으로 향하게 됩니다.
수단에 간 그들은 1993년 3월 11일 수단 남부 콩고르 아요드촌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들은 유엔비행기를 얻어타고 금세 그곳을 떠나야 했고, 때문에 그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은 약 30분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조아오는 수많은 기아 현장을 보아왔기 때문에 굶은 아이들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반면 케빈 카터는 카메라를 남에게 빌려와 180mm렌즈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와이드한 앵글을 잡을 수 없었고, 우연찮게 한 부모가 식량지원을 받기 위해 아이를 잠시 땅에 내려둔 순간, 독수리가 그 뒤에 내려와 앉았고 셔터를 누른 뒤 독수리는 다시 날아가 버렸습니다.
케빈 카터는 그 사진을 발표했고,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은 위와 같습니다. 퓰리처 상이 발표되고 케빈 카터는 아무런 반론도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반응에는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 같고, 석 달 뒤 그는 자택 근처 공원에서 약물을 흡입하고, 배기가스로 스스로의 목숨을 끊었습니다. 하지만 유서에는 소녀와 사진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고, 약물에 대한 후회와 자신이 찍은 시체, 죽음을 향하는 인간, 굶주린 아이들 등의 이미지를 안고 살았던 괴로움, 그리고 이런 상황과 스스로에게 화가 난 상태에서 퓰리처 상을 받게 되자 그 모든 것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자살을 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케빈 카터의 이야기는 '뱅뱅클럽'이라는 영화로 제작되기도 하였습니다)
2.
물론 '나이트크롤러'에서 다루고 있는 취재윤리에 대한 문제가 가볍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선 다른 사람들이 많이 이야기를 할 것이고, 사실 어느 정도 교과서적인 아웃라인은 나와있는 상태이니까, 조금은 다른 이야기를 해보죠. '나이트크롤러'는,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취재윤리에 대한 문제 외에도 굉장히 재밌는 서브이슈들을 함께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하의 내용들에는 상당부분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 영화의 타이틀인 '나이트크롤러'라는 사설 통신사가 그렇죠.
영화에 등장하는 '나이트크롤러'는 개인이 방송촬영 및 편집 장비를 갖추고, 경찰의 무선을 불법도청하여 사고 현장에 도착하여 현장화면을 촬영하고, 그 비디오클립을 뉴스 채널에 혹은 방송국에 팔아서 돈을 버는 사람들을 일컫는 은어입니다. 영화를 보고 그냥 재밌는 설정이구나, 라고만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이 '나이트크롤러'라는 존재가 등장하게 된 배경이 굉장히 재밌죠. 이는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방송권력의 쇠퇴, 그리고 시장의 확대가 함께 맞물려 나타나게 된 신종 직업입니다. 우리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VJ의 변형이기도 하죠. (버벌진트 아니구요, 비디오자키도 아니고, 비디오저널리스트. VJ특공대 할 때의 그 VJ요)
저는 지금 방송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 일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방송일은 일종의 전문직에 속했습니다. ENG카메라도 수천만원이었고, 일대일 편집기도 그랬죠. 종합편집실의 장비는 훨씬 더 비쌌고, 그것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은 권력이었습니다. 과거에는 피디로 입사해서 일대일 편집기에 손을 대기까지(그러니까 전원을 켜기까지) 일년이 걸리는 경우도 허다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나마 그런 기회는 국내에 몇 개 없던 방송사에 입사한 소수의 인원들에게만 허락되어 있었습니다. 제작한 방송을 유통시킬 수 있는 채널도 극소수였구요. 그러니 방송을 만든다는 것에 허락된 권력은 엄청났고, 동시에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을 양성하는 과정 역시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보통 도제 시스템으로 이루어진 이 양성과정에서 사람들은 고가의 장비의 전원 스위치에 손을 대기 위해 엄청난 시간을 허비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유자재로 다루게 되는 과정까지 엄청난 노력을 해야하죠.
그런데 그 모든 과정을, 지금은 백만원 정도하는 노트북 컴퓨터로 해낼 수 있습니다. 합법적인 것은 아니지만, 토렌트에서 베가스나 프리미어, 아비드, 심지어 애프터이펙트와 같은 편집툴을 무료로 구할 수도 있구요. 손바닥에 들어가는 스마트폰만 있으면 누구나 풀 HD해상도의 영상을 촬영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LTE망을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방송(스트리밍 방식으로)할 수도 있지요. 과거에 야외에서 생방송을 하기 위해서는 중계차를 비롯하여 장비를 렌탈하는 것에만 수천만원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 물론 그 정도의 퀄리티는 아니지만 - 누구든 의지만 있으면 비슷한 정도의 방송을 만들고 중계할 수 있습니다.
3.
예전에는 '방송'이라 하면 텔레비전을 틀면 나오는 4~5개의 지상파 채널만을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백 개가 넘는 케이블 채널, 그리고 스트리밍을 통해 기존 컨텐츠를 제공하는 인터넷 방송, 심지어 개인이 인터넷 사이트를 경유하여 제공하는 1인 미디어 방송까지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방송'이 제공되고 있습니다. 지금의 젊은 수용자들은 여가 시간에 텔레비전을 트는 대신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봅니다. 그리고 텔레비전 방송 대신 아프리카 방송을 보는 시청자층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1인 미디어로 방송하는 사람들 중에 인기와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도 늘어나고, 기존의 올드미디어의 출연자보다 더 많은 돈을 버는 사람도 생겨나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시장에 뛰어듭니다. 기존의 올드미디어가 가졌던 일종의 '권위' -전문가들이 만드는 방송 -는 사라져가고 그들도 동등한 위치에서 뉴미디어와 경쟁을 해야 살아남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이 그런 시대가 오는 것에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지 않습니다.
이미 뉴스영역에서는 이런 흐름이 자리잡은지 오래입니다. 종이신문 시절의 신문기자는 엄청난 권력을 가진 전문직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포털 사이트에서는 고액의 연봉을 받는 거대 신문사의 기자가 쓴 전문적인 기사와, 맞춤법조차 제대로 모르는 블로거 수준의 기자가 제공하는 기사가 동등하게 서비스 되고 있으며, 심지어 클릭수에 따라 후자의 기사가 더 중요한 자리에 노출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엄격한 게이트키핑을 거치지 않는, 자극적인 기사들이 더 많이 양산되고, 사람들은 그런 기사들을 점점 더 많이 클릭하면서 더더욱 그러한 기사가 많아집니다. 그리하여, 한때 전문직이었던 기자란 직업은, 결국 '기레기'의 위치로까지 떨어집니다.
4.
'나이트크롤러'는 똑같은 현상이 방송에서도 이루어지는 과도기적 현상을 그리는 영화입니다. 올드미디어에는 자본이 있고, 전문가들의 제작능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테크놀러지의 발전은 장비면에서 자본의 영향력을 약화 시켰고, (이하 스포일러) 제이크 질렌할은 자전거를 훔쳐서 마련한 자본금과 소니 캠코더만으로 '방송뉴스'의 세계에 뛰어들 수 있었습니다. 뉴스와 방송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방송의 문법과 제작방법, 기사작성능력 같은 스킬들을 트레이닝 하기 이전에 방송윤리와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 등을 대학에서 먼저 교육받습니다. 하지만 방송을 만드는 스킬은 대학에서 배우는 것이 그렇게 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대학 내의 장비를 가지고 실습하는 것은 최신 기술에 비해 떨어질 수도 있구요. 제가 다닌 학교가 후진 탓일 수도 있습니다만(웃음).
극중의 루이스(제이크 질렌할)란 인물이 모든 것을 인터넷에서 배운 인물이라는 것은 굉장히 흥미로운 설정입니다. 그는 인문학적인 베이스도, 철학적인 시선도 없습니다. 인터넷에서 읽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들을 가지고 조합해서 자기 것인양 행세하며 자신의 싸구려 철학을 설파합니다. 동시에 편집기술과 같은 실질적인 부분들도 인터넷에서 공부하죠. 하지만 그는 점점 더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면서 시장에서 승리하게 되고, 결국 올드미디어의 세계까지 잡아먹습니다. 이것이 과연 지금의 인터넷 뉴스, 아프리카와 다음팟으로 대표되는 1인 미디어 방송, 그리고 웹드라마 등의 컨텐츠들의 개발로 대표되는 현재의 방송흐름을 보여주는 스토리라고 생각하면, 제가 너무 오버해서 넘겨짚은 것일까요?
5.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80년대의 외화 중에 '컴퓨터 인간 맥스 헤드룸'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컴퓨터 오류로 생겨난 (일종의) AI인 맥스 헤드룸이라는 프로그램이 컴퓨터 토크쇼 호스트로 활약하는 내용의 드라마였는데요. 그 드라마 안에서 그리는 방송계의 현실이 아주 재밌었습니다. 그 안의 세상은, 무제한으로 경쟁하는 수천 개의 채널이 있고, 사람들은 돈을 내고 각 채널의 시청권을 시간별로 사서 시청하는 곳이었습니다. 80년대의 월스트리트처럼 사람들이 돈다발을 들고 '쇼 네트워크 60분 시청권 주세요!'를 외치고 있었죠.
재미있게도, 그렇게 올드패션한 형태는 아니지만, 미래의 방송환경은 그것과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습니다. 전문가의 권위, 올드미디어의 권력은 아예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세대가 흘러갈수록 점점 약화될 것이고, 저장매체와 스트리밍 기술의 발전은 다양한 형태의 플랫폼으로 방송들이 유통되는 현실을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무제한적 경쟁상태에 빠진 수천 개, 수만 개의 채널이 생겨난다는 것을 의미하죠. 미래의 셋탑박스는 지금처럼 채널에 번호를 달아놓는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의 방송창들을 늘어놓는 형태로 채널선택권을 제안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시청자를 데려오기 위해 점점 더 자극적인 방송을 만들게 될 것입니다. 보수성향의 시청자들이 TV조선을 틀어놓듯, 진보성향의 시청자들은 뉴스타파를 셋탑박스에서 선택해 틀어놓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사실 이 모든 일은, 지금도 셋탑박스 대신 노트북 한 대와 HDMI케이블만 있으면 가능한 일이기도 하죠.
6.
다시 영화 얘기로 돌아오자면, 댄 길로이의 '나이트크롤러'는 여러모로 섬뜩하고 서늘한 영화입니다. 특히 도시의 네온사인과 야경을 잡아낸 차가운 화면, 영화 내내 맴도는 짜증나면서도 가슴 조마조마한 분위기 등, 연출력의 힘이 크고 (아카데미에도 노미네이트된) 각본의 구성도 꽤 좋은 편이죠. (단 저는 제이크 질렌할의 개똥철학 대사는 별로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다들 제이크 질렌할 이빨 까는 것이 대단하다고 극찬하지만 번역의 문제일까요. 개똥철학 자체가 너무 얕고 천박해요. 얕고 천박한 인물이니 그게 문제는 아닐 것 같지만, 실제 현실의 비슷한 사람들은 이것보다 훨씬 화려하게 말한다는 게 함정이죠) 그렇지만 보는 게 굉장히 힘들었던 영화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라나다 장면에서는 너무 힘이 들어서 10분간 영화를 끊고 쉬었다 보기도 했어요.
극찬받는 제이크 질렌할의 연기도 전 별로였습니다. 일단 사이코패스가 너무 사이코패스 같아요. 현실에서 비슷한 짓을 하는 사람들을 몇 명 알고 있는데 그들은 자신을 훨씬 더 좋은 사람들로 위장할 줄 압니다. 적어도 한국사회에서는 제이크 질렌할처럼 행동하면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살아남기는 힘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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