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년 8월에 쓴 글입니다.
1.
이쯤에서 [쇼미더머니]의 세 번째 시즌을 다시 돌아봅시다; 이제 와서 사람들은 마치 바비가 처음부터 우승 후보였던 것처럼 기억하지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바비는 언더독에 가까웠죠. [쇼미더머니] 시즌3의 강력한 우승 후보는 처음부터 바스코 온리 원이었습니다. 엄청난 경력과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실력, 외모, 카리스마, 무대 매너, 심지어 오디션 프로그램의 필수 요소인 드라마까지 가지고 나온 바스코는 시즌3 초반부터 독주 체제를 갖췄고, 시즌3의 가장 핵심적인 질문은 "대체 누가 바스코를 꺾을 수 있을 것인가?"였습니다. 이 괴물은 경연이 시작되자마자 어린 아이 손목 비틀듯 상대들을 압살해 나갔습니다. 대한민국 힙합씬에서 가장 핫한 프로듀서 중 한 명인 천재노창은 신들린 것처럼 근사한 비트들을 매 라운드마다 쏟아냈고, 바스코는 그 비트 위를 휘저으며 무대에서 랩을 해댔죠. 중간에 "락을 한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그건 사실 그가 너무 강했기 때문에 경쟁을 재미없게 만드는 것에 대한 푸념에 가까웠습니다.
그때 바비는 어디 있었을까요? 고만고만한 래퍼들 사이에 숨어서 실수하지 않고 한 단계 한 단계 간신히 올라가는 참가자에 불과했습니다. 몇 번 휘청거릴 만한 위기도 있었지만, 스내키챈이, 육지담이, 비아이가, 기리보이가 순서를 바꿔가면서 논란과 비난의 중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결국은 시끄러운 일들이 다 정리되고 난 뒤엔 조용히 뒤에서 숨어서 묵묵히 계단을 올라온 바비, 올티, 아이언이 살아남아 바스코와 맞섰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이들은 더 빛나기 시작했고, 바비는 마침내 준결승에서 기적적으로 바스코를 꺾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아직은 불안한 승자의 자리였기에 아이언과의 마지막 대결까지도 긴장감을 잃지 않죠. 적어도 [쇼미더머니]의 시청자들은 기억할 테니까요. 산왕을 꺾은 뒤 북산이 허무하게 패배했던 것을.
2.
그런데 4번째 시즌에 와서는 모든 게 바뀝니다. 송민호는 과연 거대 기획사를 업고 나온 강력한 우승후보였을까요? 기획사의 이름만 지우면 그냥 비슷비슷한 동년배의 아이돌 래퍼였을 뿐입니다. 실력 상으로는 분명히 뛰어난 부분이 있었다고 한들, 3시즌의 바스코만큼 압도적인 인물은 분명 아니지요. 하지만 블랙넛은 2라운드에서 영악하게도 "어차피 우승은 송민호"라는 라임을 만들어 시즌3에서 바스코가 가졌던 '끝판왕'의 위치를 뜬금없이 덮어씌워 버립니다. 시즌3가 '바스코를 이겨라'였다면, 시즌4는 졸지에 '송민호를 이겨라'가 되어버렸는데, 정작 송민호는 그 자리를 짊어질 만한 실력도, 준비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거대 기획사와 팬덤만으로 송민호를 (경쟁에서) 모두의 적으로 만들어 버린 뒤, 블랙넛은 슬쩍 그에 대항할 호적수의 위치에 자신을 올려놓습니다.
송민호에게는 처음부터 할 필요가 없는 싸움이었고, 얻을 것도 없습니다. '어차피 우승은 송민호'라고 외치는 순간, 이미 송민호에게는 '우승해봤자 본전'인 셈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눈치도 없이 제작진이, 그리고 남은 프로듀서들이 그것을 재생산하기 시작합니다. 송민호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3.
가장 좋은 방법은, 그 프레임이 씌워진 순간부터, 이 의미없는 짓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여의치가 않았습니다. 빠져나온다는 것은, 당연히 시즌4에서 탈락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 프레임을 씌워버린 블랙넛에게 질 순 없습니다. 더 매력적인 상대, 혹은 알려지지 않은 언더독을 만나서 충분한 무대를 보여준 후에 나와버리면 되는데, 제작진은 그럴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남은 경쟁 라운드에서 송민호는 자신의 팀 동료들을 떨어뜨리거나, 혹은 팀 대 팀으로 상대편과 맞붙어야 하고, 탈락자는 프로듀서가 결정하게 됩니다. 그러는 와중에 송민호를 떨어뜨릴만한 매력적인 다른 팀의 경쟁자들은 또 거기서 탈락해서 사라져버립니다. 어처구니 없는 사이퍼 끝에 서출구가 탈락했고, 프로듀서의 선택에 의해 마이크로닷이 탈락하면서 송민호가 선택할 수 있는 '질 수 있는 상대'들은 점점 더 적어집니다.
어쩔 수 없이 송민호는 다른 방법을 선택합니다. 웃으면서 상대방의 프레임에 올라타서 끌려가는, 대한민국 야당이 주로 하는 방식이죠. 그 프레임을 긍정해 보기도 하고, 비웃어보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프레임은 대중의 뇌리 속에 점점 더 깊게 박힙니다. 손해 보는 장사라는 걸 뻔히 알지만 그렇다고 내려버릴 수도 없습니다. 점점 더 속도를 높여가는 차 위에서 뛰어내리면 크게 다칠 겁니다. 속도를 내기 전에 내렸어야 했는데, 그럴 기회가 없었습니다.
일이 여기까지 끌려온 것은, 당연히 제작진의 무능 덕분입니다. 물론 송민호의 입장이야 어떻든 쇼만 잘 뽑히면 큰 상관이 없을 수도 있는데, 문제는 쇼가 '송민호를 이겨라'가 되어버렸지만, 송민호는 바스코처럼 압도적인 존재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쇼 자체가 망가져 버렸다는 것에 있습니다.
4.
입장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전 오디션의 제작진들이 탈락자와 합격자를 그냥 흘러가는 대로 그냥 두고 벌어지는 일들만을 편집하는 것은 직무유기라고 생각합니다. 제작진들의 구성 속엔 각 라운드가 지나갈 때마다 어떤 캐릭터와 인물들이 남아서 어떤 스토리를 만들어 낼 것인지에 대한 로드맵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잘못된 방향으로 어긋날 수 있을 것 같으면 초반에 잽싸게 정리해야 합니다. 후반으로 갈수록 인물은 적어지고 쇼는 집중력이 높아지니까 그때는 룰을 건들거나 인물을 번복해서 진행시키기가 힘들 겁니다. 하지만 초반엔 인물도 많고 구성도 느슨해서 어느 정도의 유연성은 허용됩니다. 시즌3와 시즌4 모두 초반의 패자부활에 대해 시청자들은 빡빡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최대한 시즌 초반에 간섭할 수 있는 부분들은 간섭하면서 쇼를 만들 수 있는 자원을 최대한 많이 저장해둬야 합니다.
시즌4의 제작진은 이에 대해 무지했고, 심지어 돌발상황에 대한 대응능력은 제로에 가까웠습니다. 크루셜스타나 피타입 등 제작진이 신경써서 섭외한 인물들이 초반에 나가 떨어질 때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사실 피타입 같은 경우엔 어차피 무대형 래퍼가 아니라서 경연까지 살아남을 순 없을 거라고 봤습니다만, 그렇더라도 일단 초반에 쟁여둬야 하는 자원임엔 틀림 없었습니다. 초반탈락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되살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5.
거기까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닙니다. 피타입은 사실 쇼미더머니 같은 경연 무대에서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기 때문에 제작진이 버리고 간다고 생각했던 것도 나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팀 배정이 완료 됐을 땐, 무리해서라도 제작진이 간섭해야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각 참가자들이 각각의 프로듀서를 선택한 것이긴 했습니다. 하지만 누가 보아도 전력 차가 나는 것을 부정할 순 없을 겁니다. 어느 정도 외부적인 요인으로 커버할 수 있는 정도였다면 모르겠는데, 그렇지가 못 했습니다. 브랜뉴 팀엔 우승후보 넷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YG에는 주목할만한 매력적인 인물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튀는 인물인 슈퍼비와 뉴챔프는 실력과 무관하게 호감을 주기엔 좀 힘든 인물들이었고, 이노베이터와 인크레더블은 또 실력관 무관하게 눈에 잘 띄지 않는 인물이었습니다.
'공정한 대결'도 좋지만, 저는 이때 제작진이 적극적으로 간섭해서 '멤버 바꾸기 미션'이나 '멤버 뺏어오기 미션' 등을 만들어서 한 번 셔플을 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그 다음 미션은 팀원들을 탈락시키는 미션이었고, 어떤 팀원은 무대에 오를 기회를 박탈시켜야 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팀은 누굴 버려도 상관없는 입장이었다면, 어떤 팀은 다른 팀에 갔으면 당연히 무대에 섰을 멤버가 가차없이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주목해야 할 인물 중에 상당수가 의미 없이 쇼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6.
이것은 송민호 개인적으론 쇼미더머니에서 적당히 빠져나갈 출구를 막아버린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더 나쁜 것은 제작진 역시 사람들을 집중 시켜야할 인물들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브랜뉴의 번복이 프로듀서들의 결정이었는지, 뒤늦게 깨달은 제작진의 개입이었는지 제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버벌진트와 산이가 블랙넛 대신 한해를 선택했을 때, 제작진의 눈앞이 캄캄해졌을 것이란 사실입니다.
송민호가 원래 그닥 재밌는 인물도 아니었지만 '산부인과 발언' 논란으로 편집 비중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제작진의 부담도 가중되면서, 그들은 거의 모든 스토리를 블랙넛에게 맡겨두고 있었습니다. 베이식 역시 드라마가 있었습니다만, 초반의 퇴사 이야기를 제외하면 그닥 공감하긴 힘든 것이었고, 다른 인물들은 그나마의 스토리마저도 없었으니까요. 한편 시작할 때부터 퍼포먼스로 주목 받은 블랙넛은, '어차피 우승은 송민호'라는 최고의 유행어를 남기며 쇼를 이끌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블랙넛이 송민호와 제대로 된 대결을 하기도 전에 프로듀서의 선택에 의해 쇼에서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쇼의 메인테마는 '송민호를 이겨라: 블랙넛의 도전'으로 잡혀졌는데 말이죠.
7.
그래서 쇼는 블랙넛을 복귀시킵니다. 프로듀서의 결정이든, 아님 제작진의 결정이든. 근데 여기서 제작진은 또 한 번 직무유기를 저지릅니다. 4번의 시즌을 진행해온 쇼의 역사에서 가장 치명적이라 할 수 있는 번복사건이 벌어졌는데, 아무도 이에 대한 납득할만한 스토리를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그냥 두어 번의 프로듀서 인터뷰로 때우고 마는 것이죠. 모든 비난은 당연히 버벌진트와 산이가 졌지만, 제작진이 자신의 출연진을 무방비 상태에 그렇게 던져두는 것은 분명한 직무유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직 블랙넛만이 디스랩을 써와서 두 명의 프로듀서 앞에서 펼쳐보이면서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악동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해냅니다.
쇼미더머니의 시즌4는, 놀랍게도 블랙넛이 설계한 그대로 흘러갔습니다. 블랙넛은 자신이 그려왔던 역할을 제대로 잘 수행하고 제일 적당한 시점에서 쇼에서 빠져나갔구요. 심지어 중간에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릴 수 있는 위기를 한 번 제대로 넘기고 말이죠. "어차피 우승은 송민호"라고 외쳤지만, 이미 준결승이 끝난 시점에서 정해져 있었던 것 "어차피 승리자는 블랙넛"이었다는 사실입니다.
8.
그리고 제작진은 그렇게 흘러가는대로 내버려 둘수밖에 없는 무능한 피해자로 남았습니다. 그들은 쇼의 주인이자 컨트롤러였지만, 자신이 컨트롤 당하기를 자처했습니다. 왜 그들은 쓸 수 있는 자원과 인물을 스스로 내치고 초반부터 소수의 인물에게 집중하기를 선택했을까요. 기계적인 중립과 유연성 없는 진행능력이 쇼를 망치는 동안 왜 그들은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을까요. 아마 그걸 컨트롤 할 수 있는 능력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겠죠.
9.
시즌3보다 훨씬 더 실력있는 사람들이 많이 참가했다는 [쇼미더머니]의 네번째 시즌은 이렇게 끝났습니다. 그리고 이 쇼는 우리에게 한 가지 교훈을 주었죠; 실력으로 보자면 훨씬 못 미치는 래퍼들을 데리고 끝내주게 재밌는 쇼를 만든 [언프리티 랩스타]의 제작진은 정말 대단했다는 교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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