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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텔레비전

번 노티스 - 시즌 1

by 이어원 2017. 3. 6.


  스파이물이란 원래 80년대의 장르입니다. 냉전이 극에 달했을 무렵, 스파이의 활약은 각광받았고, 또 포장되었습니다. 당연히 포장과 판매에 능한 엔터테인먼트 계에서 그 좋은 소재를 놓칠 리가 없죠. 존 르 까레의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되고, 007은 스크린 위에서 전 세계를 누볐고, 제5전선 팀은 매주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A특공대 같은 유사 사설 스파이팀도 등장했고, 맥가이버도 동구권과 제3세계를 누비며 피닉스 재단의 사설 스파이로 활약했죠. 때로 유사 스파이들은 키트나 에어울프 같은 최첨단 장비들의 사용자이기도 했습니다. 심지어<겟 스마트>같은 코미디를 이끌기도 합니다. 

  하지만 냉전의 종식과 함께 스파이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스파이의 위기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 바로 KGB의 해체입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한신 타이거즈 중에 어느날 갑자기 한 팀이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해보세요. 이건 두말할 필요없이 NPB 전체의 위기입니다. 스파이들은 이제 더 이상 체제를 위해 봉사하지 않고, '적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에서 분열되어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IMF 시절의 한국사회보다 더 심한 구조조정이 있었겠죠. 그리고 스파이들에게 닥친 현실도 그때와 같습니다. 살아남으려면 그들은 변해야 했죠.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자, 는 구호가 삼성 직원들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던 겁니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영화에서 제5전선 팀은 배신에 배신을 거듭하며 뿔뿔이 흩어지고, 결국 오우삼의 영화에선 이던 헌트의 원맨 쇼가 되고 말았습니다. 007은 적을 잃고 한동안 방황하다가 결국 수십 년을 버텨온 자신의 젠틀한 이미지를 버리고, 지금은 상처입은 고독한 야수 흉내를 내고 있죠. 로버트 러들럼의 원작과 1986년에 방영된 미니시리즈<저격자(Bourne Identity)>의 제이슨 본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2000년대에 다시 등장한 제이슨 본 역시 예전의 그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사실 어느 정도의 과장과 거품, 그리고 표현 상의 문제를 제외하고 생각한다면, 미디어 언론학의 명제는 거의 진실에 가깝습니다. 영화는, 그리고 텔레비전은 어떤 의미에선 그 사회와 세계를 반영하는 거울인 것이죠. 스파이라는 직업의 위상의 변화는 스파이물이라는 장르에도 같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재밌는 것은 NBC의<척>과 폭스 텔레비전의<번 노티스>는 그런 스파이의 위상 변화를 반영하면서도, 동시에 80년대식 스파이물의 컨벤션을 함께 가져간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가 이 시리즈들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생각보다 많은 편견을 가지고 있는 저에게는 가요와 한국드라마는 90년대, 팝과 미국 TV 시리즈는 80년대가 최고! 라는 생각이 언제나 자리잡고 있거든요.

  비교하자면,<척>은 1983년에 CBS에서 방영됐고, 국내에서는 KBS에서<컴퓨터 제로작전>이라는 제목으로 방송했던<Whiz Kids>와 같은 변종 너드/수사/스파이물이라면,<번 노티스>는<A특공대>의 포맷을 베이스로 깔고,<맥가이버>식 활약을 펼쳐보이면서 때때로<케빈은 열두 살>스타일의 소시민적 감상을 덧칠한 시리즈죠. 비슷한 시기에 국내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한 탓인지 종종<번 노티스>는<척>과 비교되기도 하는데요. 비교보다는 차라리<번 노티스>가<척>의 설정을 뒤집은 것에 더 가깝다고 보는 게 옳을 듯 합니다.<척>은 평범한 너드가 스파이의 세계로 빠져들어 벌이는 소동극이라면,<번 노티스>는 역으로 뛰어난 국제적인 스파이가 마이애미의 소시민들 사이에 섞여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죠. 이 시리즈가 가지고 있는 정취는 딱 80년대에서 90년대로 넘어가는 시기의 그것입니다. 마이클 웨스턴은 훈련받은 전문적인 스파이이지만, 이제 냉전이 끝나버린 시기에서 그가 받은 훈련과 전문지식은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렸죠. 심지어 그는 어머니에게 종종 구박당하고, 동생은 그의 재능을 어떻게든 이용해보려는 생각밖에 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리즈의 매력적인 주인공답게 매번 자신에게 주어진 문제를 쿨하게 해결하고, 심지어 자신이 어떻게 이 세계에서 물러나게 됐는지 조금씩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며 조사해 나가죠. 

  각종 클리프행어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시퀄(sequel)의 21세기에<척>과<번 노티스>는 깔끔하게 하나의 사건씩만 매주 해결해 가며 자신들의 매력을 각인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착오적인 모습, 80년대스러움이 얼마나 대견한지 모릅니다. 적어도 80년대의 시크함을 떨쳐버린 채, 눈요기거리만 강조한 그 시절의 성정치학만 가져온<나이트라이더>보다는 훨씬 멋지죠. 발 킬머의 키트는 왜 그리 수다스럽고 오지랖도 넓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