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곡성]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몇 달 전에 [곡성] 시나리오를 구해다 읽었다. 원래 그렇게까지 관심을 갖고 있던 영화는 아니었는데, 나름 '봉준호가 이걸 읽고 잠을 못 잤다'는 소문을 들으니까 "아니 얼마나 대단하길래?"라는 궁금증이 일어 내가 잠을 못 자겠더라. 마침 그 구하기 어렵다는 시나리오가 (요즘엔 보통 파일로 도는 편인데, 이건 파일은 없고 제본된 책에 일련번호 붙여서 돌리더라. 나름 보안 좀 신경 쓴 시나리오인 듯?) 손에 닿는 곳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부탁해서 구해서 읽었다. 읽고 나서는? 생각보다 별로였고, 나는 잠을 잘 잤다. 봉준호는 그냥 그 무렵 불면증이 있었던 것 같다.
2.
나홍진의 스타일인지 모르겠지만, 시나리오를 쓸 때 연출에 대한 디렉팅이나 의도를 완전히 빼고(외부 모니터링도 감안한 듯 싶지만) 드라이하게 행동지시와 이미지 묘사 위주로만 쓴 탓인지, 솔직히 시나리오를 읽고 난 후 내용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만 시나리오 자체에서 딱 두 씬이 힘이 들어간 장면이 있었는데, 살을 날리는 굿을 하는 장면, 그리고 동굴 장면과 골목에서 갈등하는 곽도원의 몽타쥬가 그것이었다. 둘 다 시나리오를 보고 기대한 장면보다 조금 못하게 나왔다. 뭐 원래 영화라는 게 잘 나와야 시나리오의 80% 정도라고 하지만.
시나리오 상에는 무명의 비중이 약간 더 있는데, 들어냈다. 특히 마지막에 무명의 정체에 대해-진부한 방식으로-비교적 정확하게 밝혀주는 장면이 있는데 영화에선 잘려나갔다. 초반부 일본인이 낚시하는 장면과 아녀자를 겁탈하려는 장면도 약간 더 구체적으로 써있는데, 편집으로 축약했다. 시나리오에서 잘 묘사되지 않았지만, 나름 동굴, 일본인의 숙소 등을 음산하게 묘사했는데, 나는 박찬욱 식으로 약간 과잉된 미술을 보여주는 것을 생각했지만, 의외로 소박하게 찍었다. 대신 인공적인 미술이 아니라 곡성의 풍경을 보여줄 때는 '저렇게까지 정성들여 찍을 필요가 있는 장면인가' 싶을 만큼 감탄하게 잘 찍었다. 뭘 하려는진 알겠는데, 오컬트면 그것보다 더 장르적인 부분에 신경을 쓰는 영화가 더 내 스타일에 가깝다.
한 마디로 일본인 거처와 동굴의 미장센은 기대보다 별로였단 얘기다.
3.
앞뒤 안 맞는 이야기지만, 몰입도 높게 쪼이는 연출로 만들어 놓고 거기에 이런 저런 해석을 덧붙일 수 있도록 마구 지르는 방식은 15년 전 [로스트]에서 많이 봤었고, 종교적인 상징으로 해석을 덧붙이는 건 20년 전 [에바]에서 신나게 해봤던 짓이라... 별다른 감흥이 없다. 몰입도가 높다는 후반부는 시나리오에서 다 읽었던 부분이라 사실 연출 상의 느슨한 부분들이 먼저 보였다. 시나리오를 읽지 않고 봤으면 더 좋게 볼 수 있을 거란 생각도 든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공포영화를 잘 못 보는 사람인데, 진심으로 단 한 장면도 무섭지 않았다.
4.
위에서도 얘기했지만 [로스트]와 [에바] 생각이 났다. 유령과 사람과 악마가 폐쇄적인 공간 내에서 현실적인 듯 부딪치지만, 사실 알고 보면 다 비현실적이고 장르적인 이야기라는 건 영락없이 [로스트]였다. 뜬금없이 벼락맞는 장면은 진짜 [로스트]에서나 나올 듯한 사건 아닌가. 그런데 [로스트]나 [곡성]이나 둘 다 캐릭터가 합리성과 개연성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내러티브의 진행을 위해 제멋대로 움직였다면, [로스트]에선 그나마 장르 컨벤션 내에서 일관된 느낌이라도 주는데, [곡성]에선 그것도 아니고 다 제멋대로라서 짜증이 났다. 제대로 자기 의지로 움직이는 메인 캐릭터는 일본인, 일광, 곽도원 정도이다. 나머지는 그저 하나의 스텝을 형성하기 위한 도구들일 뿐이다. 곽도원을 일본인에게 안내하기 위한 캐릭터, 곽도원에게 굿을 하고 무당을 끌어들이게 하기 위한 캐릭터, 그외에 그냥 있어야 하니까 있는 캐릭터들... 많은 배우들이 등장하지만 자기 역할을 하는 캐릭터는 별로 없다. 물론 나홍진이 경제적이거나 잘 짜여진 치밀한 이야기를 하는 감독은 아니긴 하다. 개인적으로는 [황해]도 훨씬 적은 배우와 적은 버짓, 그리고 짧은 러닝타임으로 훨씬 더 쫄깃하게 만들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하는데, [곡성]을 보면서도 같은 생각이 들었다.
5.
종교적인 상징을 뜬금없이 갖다 붙이고, 그게 대단한 척 으스대는 건 [에바]에서 충분히 울궈먹은 전략이다. 뭘 노리는지는 알겠다. 일본인은 대놓고 예수의 여러 행적을 비틀어서 따라한다. 예수는 신이면서 인간의 육체를 가진 존재였다. 일본인은 귀신이면서 인간의 육체를 가진 존재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세상에 왔고, 그렇기 때문에 민중들의 미움을 사게 되는 행동을 했다. 일본인도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목적을 위해 그런 일을 벌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죽어서 악마로 부활해야 하지만, 스스로 죽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를 죽이도록 유도해야 할 것이고, 곽도원을 그런 사명을 가진 존재로(본디오 빌라도처럼?) 택한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곽도원이 일본인을 죽이기 위해 차를 몰고 나설 때 일광은 '미끼를 물었다'라고 말한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날 한 명의 인간으로 자신에게서 이 잔을 빗겨나게 해달라고 울며 기도했다. 일본인도 죽기 직전 인간으로서 약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결국 죽음을 맞고, 예수는 동굴에서 부활하여 신적인 존재로 승천한다. 일본인은 동굴에서 악마로 부활한다.
...그래, 알겠다. 근데 뭐 어쩌라고?
6.
또 하나 [곡성]에서 물고 늘어지는 키워드는 '의심'이다. 시작의 에피그라프로 쓰이는 누가복음의 구절은 도마(토마스)가 예수의 부활을 '의심'할 때 그것을 확신시키기 위한 구절이다. 곽도원은 원래 소심한 겁쟁이였다가, 어느 순간 일본인의 집을 가장 앞장서서 찾아나서는 의협심 뛰어난 인물로 건너 뛰는데, 이렇게 인물이 순식간에 성격이 변하는 널뛰기를 하면서도 한 가지 일관되게 멈추지 않는 것이 '의심'이다. 내러티브는 곽도원의 '의심'을 동력으로 하여 진행되고, 클라이맥스에서도 그의 의심이 가장 강력한 갈등의 구조가 된다. 그는 일광의 말도 의심하고, 무명의 말도 의심한다. 그러므로 골목길에서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고 가만히 서있기만 한다.
곽도원이 일본인을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비극은 시작되고, 일광과 무명 누구도 믿지 못하고 둘 다를 의심하면서 가족은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다.
근데 그 의심많은 곽도원이... 뜬금없이 장모가 와서 굿을 하자고 그럴 때, 그리고 무당이 천 만원이나 내고 굿을 하자고 할 때는 의심 한 마디 없이 턱 내놓는단 말이지.
...나는 시나리오를 읽으면서도 그 점이 참 궁금했다. 그래도 한 마을의 순경이면 공무원이고, 나름 그 마을에선 똑똑한 축에 드는 사람들일텐데... 그러면 개중에서 가장 합리성에 대한 자신감을 갖춘 인물일텐데, 초반에 단 한 번의 반항도 없이 그렇게 샤머니즘에 대한 해결책을 턱, 받아들이는 게 너무 부자연스러워서...
물론 계속해서 오컬트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직접적으로 피해를 당하게 되면 그렇게 넘어갈 수는 있다고 치는데, 그러기엔 너무 초반부부터 샤머니즘으로 넘어가 버린단 말이지... 이게 마치 '이건 그렇다 치고'의 느낌이 너무 확 강해서...
7.
나홍진의 인터뷰를 대충 읽어보니, 애초부터 앞뒤를 짜맞출 생각은 하지 않은 듯 하다. 우리 모두의 무릎을 탁! 하고 치게 만들고 이 모든 것을 하나로 꿰어맞춰 이해시킬 세계관이나 설정 같은 것도 없다. 귀신은 대낮에도 나와서 돌아다니고 폴리스 라인을 들어 올리는 물리력도 가지고 있는데, 설정상으로는 지박령이다. (잘려나갔지만, 시나리오 상에는 지나가는 차가 무명을 그냥 통과하는 장면이 있다) 일본인은 귀신이면서 악마고, 죽은 뒤에도 오랜 동안 살아남은 존재인데, 여권도 가지고 있고 돈 내고 시장에서 물건도 사며 버스를 타고 다닌다. (카메라는 미놀타를 쓴다) 그리고 이 모든 게 '원래 그런 거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또 [로스트] 생각이 났다. 에이브럼스도 처음에 검은 연기가 나타날 때 그게 뭔지 제대로 생각해 놓진 않았을 거다. 검은 연기가 사람이 됐을 때도 그냥 그게 '연기이면서 사람이고 악마인 뭔가'라고 생각했을 거지, 그게 왜 그러는지 끝까지 생각해놓진 않았을 거다. 하지만 적어도 에이브럼스는 시즌 6에서 얼기설기 뭐라도 설명해주긴 했다. (그러고보니 [로스트]도 결국 종교적인 텍스트를 끌어들였구나. 그 기원은 카인과 아벨 아닌가)
8.
온라인의 뜨거운 반응과는 달리, 역시 극장에서는 엔딩 크레딧이 나오자 다들 뜨악한 느낌이 먼저 전해졌다. 전체적인 반응은 [황해]와 비슷했지만, 이유는 좀 다르다. [황해]는 편집이 성기고 불친절하기는 하지만, 짜맞추면 이야기는 다 맞아떨어진다. 다만 좀 더 컴팩트하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포기하고 크고 장황하게 풀어갔을 뿐이다. (나는 [황해]를 조성하를 중심으로 풀었으면 훨씬 깔끔한 코엔식 스릴러가 되었을 거라고 믿고 있다)
반면 [곡성]은 [추격자]처럼 힘있게 달려가긴 하지만, 앞뒤를 짜맞춰보면 제대로 일치하는 게 거의 없다. 등장인물의 성격은 물론이고, 선역인지 악역인지, 심지어 설정들조차 지멋대로 널뛰기를 해댄다. 악은 흑마술을 쓰는 인간인지, 귀신인지, 악마인지, 뭔지도 모르겠고, 심지어 뜬금없이 좀비까지 등장한다. 신기한 게 좀비는 서양영화에 나오는 좀비의 행동양식을 그대로 가지는데, 보통 좀비는 부두교 쪽의 설정을 가져오거나 그도 아니면 과학적인 설정을 가져오는데 도대체 일본인의 굿이 어느쪽인지는 전혀 알 수 없으며, 왜 그런 굿을 하는지 이유도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는다. 다만 두 개의 굿을 교차편집 시켜서 관객을 속여보려고 그런 몽타쥬를 만들었고, 그 몽타쥬를 핑계삼아 좀비씬을 한 번 연출해보고 싶은 의도가 있었다면 이해하겠는데... 글쎄,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게 별로 건전한 창작동기처럼 보이진 않는다.
10.
후반부 반전의 결정적인 근거가 되는 훈도시나 좌측차로 운전 같은 장면은 시나리오 상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시나리오 상에는 마지막에 일광이 사진 찍는 장면이 오히려 뜨악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저 새끼는 뭐야?"라는 생각 밖에는...
...그리고 다 보고 나면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도대체 곽도원은 온갖 사람은 다 의심하면서, 내 돈을 천만원이나 슈킹하려는 무당은 왜 그리 철썩같이 믿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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