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년 11월에 쓴 글입니다.
1.
'미스터 홈즈'를 선택하기 전, 오늘 밤엔 무슨 영화를 볼 것인가, 라는 문제에 대해 저는 두 개의 선택지를 더 놓고 고민했습니다. 하나는 '슬로우 웨스트'였고(영화가 보고 싶기도 했지만, 늦은 밤이었기에 러닝타임 짧은 영화가 필요했죠) 다른 하나는 픽사의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이었습니다. 셋 다 보고 싶었던 영화였는데, 역시 '홈즈'라는 이름을 버리긴 어려웠습니다. 다행히 영화는 현악기를 사용한 오프닝 테마가 울려퍼지고 서섹스 지방을 달려가는 기차가 등장하는 첫 장면부터,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만큼 굉장히 훌륭하고 맘에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영화가 끝나자마자 새벽에 이렇게 글을 쓰고 있죠.
2.
'미스터 홈즈'에서 방점은 '홈즈'가 아니라 '미스터'에 찍혀있습니다. 네이버 영화의 분류는 태연히 '범죄, 미스터리, 드라마'로 되어 있습니다만, 이 영화에선 마땅히 범죄라는 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처음엔 잠시 추리물인 척 해보지만, 셜록 홈즈 소설에서 흔히 기대하는 영국식 살인, 혹은 트릭이 끼어있는 범죄, 그리고 명쾌한 해결을 기대했다면 낭패를 보기 일쑤입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그런 셜록 홈즈 컨벤션을 계속해서 부정하면서, 홈즈의 외연을 넓히고 있는 외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93살 먹은 괴팍한 노인과 소년이 우정을 나누는 이야기라고 보면 더 좋습니다. 굳이 레퍼런스를 끌어오자면 '시네마천국'이나 '파인딩 포레스터' 같은 영화가 될 수 있겠죠. (혹자는 이걸 '노소물'이라고 부르기도 하더군요. 그럼 '죽음보다 무서운 비밀' 같은 영화도 들어가야 하는 건가...) 다만 이 영화에서는 93살 먹은 그 괴팍한 노인이 수많은 사건을 해결한 세계적인 명탐정 셜록 홈즈였던 것 뿐입니다.
3.
아, 그러고 보니 홈즈는 우리가 말하는 '괴팍한 노인'의 조건에 얼마나 딱 들어맞는 인간인가요. 젊었을 때부터 따뜻한 말 한 마디 할 줄 몰랐고, 교만하고, 자신만이 옳다는 확신으로 가득 찼으며. 남들을 무시하는 데다가, 집에 틀어박혀서 기행을 일삼았지요. '미스터 홈즈'는 이런 노인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한 가지 사건을 겪었고, 그 때문에 시골로 와서 한 소년을 만나 함께 우정을 나누며 자신이 깨달은 인생의 교훈에 대해서 알려주는, 전형적인 '노소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 93살 먹은 괴팍한 노인이 하필이면 셜록 홈즈였던 것 뿐이구요.
사람이란 게 원래 죽을 때가 되면 감성적인 된다고 합니다. 셜록 홈즈의 마지막 이야기 역시 그렇습니다. 평생 돋보기를 들고 사건과 죽음의 원인을 규명하고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에만 익숙해진 한 교만한 노인이, 진짜 '삶'을 나누는 법을 배우는 이야기는 당연히 감동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셜록 홈즈라고 해도 말이죠. 아니, 그게 셜록 홈즈니까 더 감동스럽지 않겠습니까.
4.
미치 컬린의 소설이 원작입니다. 원래 볼 생각이 없었는데 영화가 너무 맘에 들어서 소설도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빌 콘돈의 이름은 예전부터 들었는데, '브레이킹 던'같은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이후로는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미스터 홈즈'의 연출은 엄지손가락 두 개를 들어 2따봉을 외쳐도 문제 없을 정도로 완벽합니다. 서섹스의 아름다운 풍경과 자연광으로 가득 채운 화면, 기존의 홈즈 삽화와 영화에서 본 스테레오타입들을 깨뜨리면서도 어색함이 없도록 준비한 소품과 미장센, 인상적으로 깔리는 고급스런 현악 스코어, 이언 맥켈런의 연기, 트래킹을 기가 막히게 사용한 촬영, 스토리 곳곳에 뿌려놓은 복선과 상징을 차근차근 거두어 들이는 구성까지... 흠잡을 곳이 전혀 없습니다. 스토리 상으로 보면 소품인데, 다 보고 나면 전혀 소품 같은 느낌이 나지 않아요. 미치 컬린의 소설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인 예상으로는 드물게도 원작보다 영화가 더 좋은 경우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눈이 호강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5.
물론 홈즈의 팬이라면, 이것을 좋게만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도 있을 거라고 봅니다. '미스터 홈즈'는 마치 예수가 기록에 남아있지 않은 기간동안 인도에 가서 석가의 제자로 공부를 했다, 라는 설을 접하는 크리스천에게만큼이나, 셜록키언에게 불경스럽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외경이기도 합니다. 평생 논리와 지적 능력으로만 살았던 그가 자신의 삶을 부정하고 '나는 외로운 사람이었다'라고 읊조리는 모습은 그래서 더욱 슬퍼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전'과 '외경'이라는 셜로키언의 시선을 벗어나면, 홈즈라는 텍스트를 가지고 만든 또 하나의 매혹적인 2차 창작물임에는 틀림없죠. 충분히 즐길 만한 퀄리티로 만들어진.
ps.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설마 <마이 걸>처럼 결말이 나진 않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이 맞았을 때의 섭섭함이란...
그리고 그 메이드 아들은 쓸데없이 너무 잘 생긴 데다가 입는 옷도 다 프레피 룩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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