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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S/모던 뱀파이어 슬레이어

모던 뱀파이어 슬레이어 창작노트 (4) - 조선박람회



박람회는 그 성립초기부터 국가와 자본에 의해 연출되고, 사람들을 동원하는 방식과 수용하는 방식이 전부 결정지어진, 상연되는 문화적 텍스트이다. 

- 요시미 순야(吉見 俊哉), <박람회 - 근대의 시선>



MVS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빼놓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핵심 키워드는 '조선박람회'입니다. MVS의 메인스토리는 조선박람회장에서 시작해서 (여러분이 아직 읽어보시진 못했지만) 조선박람회장에서 끝납니다. 프롤로그에서 제일 처음 독자들이 마주하게 되는 것은 조선박람회의 휘장을 건 기차이며, 주인공인 이상이 슬레이어의 운명으로 들어서게 되는 장소도 조선박람회장입니다. 그리고 최후의 결전이 벌어지게 되는 곳도 바로 조선박람회가 될 것입니다. 


때문에 '경성'을 배경으로 한 수많은 작품들이 로그라인에 '1930년대'를 내세우고 있지만(사실 토리코믹스의 소개페이지조차 MVS가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죠), MVS의 정확한 시대적 배경은 (조선박람회가 개최되었던) 1929년이 맞습니다. 심지어 이 1929년을 맞추기 위해 저는 몇 가지 역사적인 사실조차 어긋나게 쓸 수 밖에 없었던 장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꼭 조선박람회를 이 작품의 메인스테이지로 등장시키고 싶었습니다. 그 이유는 역시 이 작품의 주제인 '근대'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 글의 제일 윗쪽에 에피그라프로 인용된 요시미 순야의 문장처럼 박람회는 국가와 자본에 의해 연출된, 상연되는 문화적 텍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연의 목적, 텍스트의 목적은 한 가지죠. 근대화의 성과를 한 곳에 모여 보여주는 것입니다. 근대적 의미에서의 최초의 박람회라 할 수 있는 영국 런던 박람회부터 그랬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기술과 산업분야에서 급성장한 영국은 이 성과를 전 세계에 과시하고 싶었고, 런던박람회에서 유리와 철골로 만들어진 수정궁(crystal palace)이란 전시물을 세워서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질세라 프랑스는 1889년 파리박람회에서 에펠탑을 공개했죠. 이처럼 근대적 박람회는 산업혁명의 성과물과 식민지에서 얻은 재화를 전시하고 여기에 새로운 상품과 소비, 오락을 더해 대중의 욕망을 재현한 '스펙터클한 공간'이었습니다. 


일제 역시 문화통치기간 중 근대화의 성과들을 선전하기 위해서 일본 본토 뿐 아니라 조선에서도 크고 작은 수십 회의 박람회를 개최했었습니다. 1929년의 조선박람회는 그중에서도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최대 규모의 박람회로써, 심지어 개최장소도 경복궁이었습니다. 앞서 말한 '스펙터클'의 최정점이라고 할 수 있죠. 조선을 식민지화 시킨 일제가, 조선의 왕궁을 자신들의 근대화 성과를 자랑하기 위한 장소로 사용한 것입니다. 대단한 오만이며, 능욕이기도 하죠. 

그렇기 때문에 역시 MVS의 주제인 근대와 전근대의 대결을 부각시키기 위한 메인 스테이지로 저는 역시 조선박람회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표면적으로 보기엔 왕정이 전근대이고, 기술력과 문화가 근대가 될 것이겠지만 그 이면에는 전근대적인 식민지적 야욕이 함께 숨쉬고 있었고, MVS의 최종장에서 우린 그러한 식민지적 야욕이 근대적 스펙터클인 박람회를 어떻게 피의 비극으로 물들일 수 있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몇 가지 트리비아를 더하자면, 1929년의 조선박람회를 끝으로 일본은 군국주의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따라서 조선에서 개최되는 대규모의 박람회 역시 조선박람회가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이후 전후에도 일본은 오사카 만국박람회 등을 통하여 문화와 경제의 성장을 어필했습니다. 앞서 말했듯 박람회는 대단히 근대적인 상징이기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적인 요소이기도 한데요. 실제로 제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일본인들만큼 만국박람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별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오사카 만국박람회는 우라사와 나오키의 명작 <20세기 소년>에서 중요한 모티브의 하나로 등장하기도 하죠. 

한편 박람회가 끝난 후, 경성에서 '근대의 기술과 소비를 전시하는 스펙터클'의 역할은 백화점이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유럽의 열강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난 백화점은 과거 박람회장을 닮아있었죠. 경성의 미쓰꼬시 백화점(지금의 신세계 백화점)도 역시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는데요. 이 미쓰꼬시 역시 최동훈 감독의 <암살>에서 마지막 결전의 무대였습니다. 역시 창작자라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건 다 비슷비슷하죠. 




ps. 글작가가 이렇게 자기 하고 싶은 것을 멋대로 하고 있으면, 당연히 고생하는 것은 그림작가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MVS 초반에 등장하는 조선박람회의 팜플렛은 실제 조선박람회 팜플렛을 고증하여 디자인 된 것입니다. 물론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한 것이지만, 어떻게 보면 제 욕심이라 볼 수 있는 부분까지 충실하게 시각화 시켜주시는 분들에게도 항상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좀 도와주십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