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 MVS의 메인 테마는 근대와 전근대의 대립이라고 밝혔습니다. 모든 작가들이 그렇겠지만, 저 역시 당연히 첫 장면을 이러한 주제가 정확하고 명쾌하게 상징적으로 드러나게 쓰고 싶다는 욕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욕심을 위해서 근대성에 대한 여러 책을 읽어야 했고, 그 중에서도 수잔 벅모스의 책에서 가장 핵심을 짚은 한 마디를 찾아낼 수 있었죠.
일단 저는 첫 장면을 쓰기 위해서 제일 첫 줄에 수잔 벅모스의 말을 적었습니다;
철도는 지시물이었고, 기호는 진보였다. 공간적 운동은 역사적 운동개념과 너무나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철도와 진보는 더 이상 구분될 수 없었다.
- 보기의 변증법: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기차는 물류와 인간의 이동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 왔고, 그것이 진보의 시작이었다는 통찰. 19세기 이래로 기차는 진보의 은유였고, 진보는 곧 근대성의 핵심 이념 중 하나였습니다. 저는 끝도 없이 넓은 사막 한 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철로, 그리고 그 위를 연기를 내뿜으며 달려가는 기차의 이미지를 놓고, MVS의 첫 장면을 작업했습니다.
MVS는 작품화 되기까지 시간도 오래 걸리고, 여러 가지 제작 타입으로 고려되었기 때문에 MVS의 첫 장면 역시 굉장히 다양한 형식으로 쓰여졌습니다. 처음에는 드라마로 제작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트리트먼트와 대본이었고, 웹소설 형태도 되었다가, 최종적으로는 웹툰 글콘티로 다시 만들어졌습니다. 그중에서도 글작가의 비중이 가장 큰 웹소설 버전이, 이런 저의 의도를 가장 잘 반영해서 쓰여졌는데요. 개인적으로도 웹소설의 첫 장면은 제가 쓴 글 중에서도, 의도대로 가장 잘 쓴 부분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기에 그대로 한 번 옮겨 보도록 하겠습니다.
만주의 밤은 광대했다. 달빛 하나 없이, 마치 태초太初처럼 끝도 없고 시작도 없는 거대한 어둠이 조금의 밝음도 용납하지 않은 채 사막을 통째로 삼켜버린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 어둠으로 가득 찬 사막 위를 곧게 가로지르고 있는 철로 위로, 만주국의 깃발을 휘날리는 증기기관차 한 대가 날카로운 칼날처럼 밤을 가르며 달리고 있었다.
만주의 다른 벌판처럼, 이곳도 애초엔 모래와 흙먼지뿐인 사막이었으리라. 하지만 인간의 힘은 위대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관동군의 힘은 위대했다. 그들은 이곳에 철로를 놓았고, 그 위를 따라 증기기관차를 타고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대량의 물자들이 그 위를 지나가곤 했다. 그 철로의 한쪽 끝은 중국 본토와 상해上海까지 닿아 있었고, 다른 한쪽 끝은 조선朝鮮의 경성京城까지 뻗어 있었다.
수잔 벅모스의 말처럼, 그렇게 쭉 뻗은 철도는 사막이라는 거대한 자연을 정복한 인간의 위대한 진보의 상징처럼 보였다. 19세기 이래로 기차는 진보의 은유였고, 또한 근대성의 상징 중 하나였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만주 사막을 달리고 있는 이 ‘근대성의 상징’은 아무리 봐도 조금 수상했다. (하략)
요즘 젊은 친구들의 기준엔 촌스러울지도 모르지만, MVS 소설판의 첫 문단은 상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밤'은 말 그대로 전근대의 상태입니다. 그 전근대는 '조금의 밝음(근대성, 이성, 합리)도 용납하지 않은 채 사막이란 세상을 삼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위로 하나의 근대성의 상징(철로/철도)가, 말 그대로 '어둠을 헤치고' 달려갑니다. 그것은 인간의 진보와 위대함이기도 하면서 모순되게도 '관동군'이라는 전근대적인 제국주의의 힘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순의 근대는 중국의 상해부터 비롯되어 하나의 선(線)을 통해, 그리고 '관동군'에 의해 경성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명쾌하게 보여주고 싶었죠.
사실 경제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원래 프롤로그로 쓰여진 이 마적떼 습격장면은 그닥 필요하지 않은 장면이기도 합니다. 드라마로 만들어지면, 제작비가 많이들 장면이기도 하고, MVS의 주된 재미 포인트인 톡톡 튀는 대사, 빠른 템포를 절제하고 다소 무게를 잡고 있는 장면이기도 하죠. 액션도 많고, 도시 위주의 장면들에 비해 사막을 배경으로 하여 다소 톤이 튀기도 합니다. 물론 유럽의 뱀파이어들이 상해에 몰려들고, 아시안 뱀파이어들의 본거지가 상해이며, 흑룡회가 그 상해에서 뱀파이어들을 경성으로 데리고 들어온다, 라는 설정을 보조적으로 설명해주는 역할을 하기는 합니다만, 그건 다른 방식으로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당연히, 이 장면의 대안으로 생각해둔 첫 장면도 있습니다. 경성 역에 열차가 등장하는 장면이죠. 지금의 3부에서 볼 수 있는 열차 장면이 첫 장면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나중에 기예르모 델 토로의 <스트레인>을 보는데, 1부 시작이 제가 썼던 첫 장면 대안과 상당히 비슷하더군요. 비행기와 철도라는 차이만 빼면요. 물론 <스트레인>에 대해선 나중에 좀 더 중요하게 다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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