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VS의 최초의 구상은 2008년 쯤이니까, 10년 정도 된 셈입니다. 당시 씨네21에서 한국영화의 새로운 기획 중 1930년대 경성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에 대해서 다룬 기사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란 소설을 원작으로 한 <모던 보이>를 비롯해, <원스 어폰 어 타임> <기담> 등 1930년대 경성을 배경으로 한 컨텐츠들이 붐을 일으키며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러한 경향은 오늘 날까지도 꾸준히 이어져 오고 있죠.
창작자 입장에서 1930년대의 경성은 굉장히 매력적인 시대입니다. 적당히 이국적이고, 적당히 판타지 느낌도 낼 수 있죠. 엄연히 이 땅에 존재했던 시대이면서, 조선시대처럼 낡아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기사를 읽으면서 경성에 가장 끌렸던 점은 근대와 전근대가 불균질하게 혼재하는 시대였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1930년대의 경성 하면 연상하는 것은 전근대적인 조선이 근대적인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현대적인 문명의 이기들이 하나씩 경성의 밤거리를 수놓기 시작할 무렵의 모습입니다. 화려한 전기 조명, 양장을 입고 밤거리를 활보하는 모던 보이와 모던 걸들, 서양식 건물들, 거리에 수많은 카페와 고히(커피)를 마시는 사람들, 축음기에서 울려퍼지던 스윙 재즈와 자유연애를 속삭이던 남녀들의 모습 같은 것 말이죠.
그런데 역으로 1930년의 경성의 화려한 모습 뒤편엔, 여전히 빈민들이 하루 하루 끼니를 때우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또한 모던 보이들의 자유로운 사상과 활동의 기저에는, 여전히 식민지 사회라는 전근대적인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었구요. 저는 그 불균질함에 알 수 없는 매력을 느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저에겐, 제 창작 인생의 아주 중요한 밑바탕이 된 두 개의 텔레비전 시리즈가 있었는데, 바로 <프렌즈>와 조스 웨던의 <버피 더 뱀파이어 슬레이어>가 그것들이었습니다. 저는 낙랑 팔라에 모여 서로 재담을 뽐내던 이상과 박태원, 김유정을 비롯한 구인회의 모습이 마치 센트럴퍽에 모여서 이야기하는 로스, 챈들러, 조이처럼 그려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특히 저는 '모던' 혹은 '근대'라는 개념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이 '모던'이라는 개념 자체가 기존 전근대의 비합리적인 태도와 사상을 타파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센트럴퍽에 모인, 아니 낙랑팔라에 모인 모던 보이들은 기존 조선 사회의 적폐인 전근대적인 요소들을 거부하며, 그것을 비웃는 존재들로 그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시점에서 갑자기, '모던 보이'가 근대적인 존재라면, 그 근대에 대항하는 '전근대적'인 존재가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뱀파이어'에 대해서 떠올렸습니다. 뱀파이어란 원래 합리적인 생명의 법칙을 배반하는 전근대적인 존재입니다. 일종의 '빛'으로 상징되는 이성과 합리성등이 근대의 산물이라면, 뱀파이어는 그 빛을 피해다니는 힘있는 전근대적인 존재였습니다. 저는 조스 웨던의 <버피 더 뱀파이어 슬레이어>의 열렬한 팬보이였고, 이상과 구인회가 센트럴퍽의 프렌즈 뿐만 아니라 스쿠비갱(버피, 자일즈, 잰더, 윌로우 등으로 구성된, 뱀파이어와 괴물들을 때려잡는 너드/기크 집단)의 구성과도 비슷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근대와 전근대가 공존하는 경성이란 공간에서, 근대를 상징하는 모던 보이와 전근대를 상징하는 뱀파이어들이 대결을 벌이는 모습. 그것이 최초의 MVS를 구상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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