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포의 외인구단>에 대한 사람들의 가장 보편적인 오해 중 하나는, 이 이야기가 오혜성과 최엄지의 애틋한 순애보 혹은 로맨스이며, 최엄지는 오혜성의 변치 않는 첫사랑의 신화, 혹은 구원의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많은 이들이 원작 만화를 보기 보다는 최재성 주연의<이장호의 외인구단>을 기억하기 때문이며, 더 정확히는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로 시작되는 정수라의 감미로운 주제곡에 속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작을 보면 기실 오혜성-최엄지-마동탁으로 이어지는 삼각관계 속에서 정상적인 '사랑'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혜성이 최엄지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 그냥 병든 집착입니다. 최엄지는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오혜성이 가지고 있는 병든 집착을 이용해 먹는 썅년입니다. 마동탁이요? 그는 최엄지를 인질로 잡고 자신의 상처입은 자존심을 보상받기 위해 끊임없이 오혜성을 도발하는 개새끼입니다. 오혜성은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은 뭐든지 한다"라고 얘기하지만, 그것은 돌아올 수 없는 유년기의 애틋함에 대한 갈증을 보상받으려는 자기기만이고, 그것이 결국 자신의 인생 전체를, 나아가서는 남의 인생까지 망치고 맙니다. 최엄지는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오혜성을 이용하다가 끝내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하고 미쳐 버립니다. 마동탁이요? 자존심과 양심과 자신의 결혼생활까지 팔아서 단 한 번의 승리를 얻어냅니다. 이것은 이기적이고 미친 인간들이 펼치는 거대한 비극입니다.
2.
그리고 그 비극의 배경에는 바로 80년대가 있습니다. 끊임없이 거품을 흘리며 성장해 나가는 풍요로움과, 그 속에서 욕망을 향해 달려나가는 불나방 같은 인생, 그리고 사랑과 진심이라는 가치가 사라지고 돈과 안정이라는 단어가 여자에게 더욱 와닿기 시작하던 그 시절 말이죠. 90년대처럼 완전히 쿨해지지도 못하고, 그 이전처럼 순박하지도 않은 어중간한 시대의 방황하던 청춘들. 점점 더해가던 빈부의 격차와 그로 인한 계급간의 차이 속에서 더 강해지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목숨까지도 걸겠다던 청춘들의 욕망이 빚어낸 비극, 이것이 바로<공포의 외인구단>, 그리고 같은 스토리 작가(김민기)가 쓴 또 하나의 이현세 만화<지옥의 링>입니다. (두 작품은 거의 양면의 거울처럼 같은 주제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3.
<공포의 외인구단>은 병든 인간들의 이야기입니다. 오혜성은 성장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유년기로 회귀하고자 하는 위험한 소년입니다. 그리고 그 실현은 바로 엄지를 손에 넣는 것, 입니다. 이것은 역시 스토리작가 김민기의 또다른 이현세 만화<지옥의 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혜성은 끊임없이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한다"라고 말하지만, 과연 최엄지가 정말 오혜성이 야구선수가 되는 것을 바랐을까요? 그냥 위로처럼 스쳐지나간 어린 시절의 말에 오혜성은 집착합니다. 왜냐면, 그 말 이외에 오혜성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혜성의 유년기에는 단 두 개의 인간관계만이 존재했습니다. 하나는 술을 마시면 오혜성을 때렸지만 평상시에는 다정했던 아버지, 그리고 오혜성을 동정했던 최엄지. 아버지라는 인간은 자신의 삶의 의미조차도 모르는 인간이었으니, 오혜성에게 삶의 의미를 찾아줄 수 있을 리 만무합니다. 보통 저런 경우에 애들이 엇나가게 되죠. 그러나 그걸 막는 게 하나는 엄지고, 다른 하나는 야구입니다.
원작에서 야구를 선택한 건 오혜성입니다. 동네 애들이 야구하는 걸 보면서 "저걸 해보고 싶었어"라고 말하죠. 하지만 그 길로 인도한 건 최엄지입니다. 그 순간 오혜성에게 야구는 소명(昭命)이 됩니다. 최엄지는 "넌 좋은 야구선수가 될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하는데, 오혜성은 그것을 "좋은 야구선수가 되어라"라는 명령으로 알아듣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라캉스럽고, 지라르스럽게도 엄지가 욕망(하고 있다고 오해)하는 것을 자신도 욕망하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오혜성은 이야기합니다.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라고.
4.
오혜성에게 행복했던 시절은 엄지와 함께 했던 유년기 뿐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혜성은 끊임없이 그 유년기로 돌아가기를 꿈꿉니다. 그것은 '엄지를 가지는 것'으로 실현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엄지는 더 이상 그때의 소녀가 아닙니다. 그녀는 고교 최고의 강타자, 인기스타 마동탁의 여인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녀는 잔인하게 오혜성에게 말합니다.
"내 말 똑똑히 들어, 혜성아. 탁이에겐 나말고도 따르는 여학생들이 많아. 난 그 애들에게 탁일 빼앗기고 싶지 않아. 넌 내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한다고 그랬지? 그렇다면 탁이와 나 사일 방해하는 일은 하지 말아줘. 난... 탁일 너무 좋아하고 있어."
- 공포의 외인구단 1권, 엄지의 대사.
5.
이쯤에서 비교해보고 싶은 것은 당연히<지옥의 링>입니다.야구대신 복싱이라는 경기를 택한 것, 죽음을 능가하는 지옥훈련 대신 죽을만큼 아픈 강펀치를 받아내는 맷집을 부각시킨 것을 빼면, 두 작품의 주제는 거의 비슷합니다. 반면 최엄지라는 캐릭터의 부정적인 면은<지옥의 링>에서 더욱 돋보입니다. 아주 막 얘기하자면,<공포의 외인구단>에서의 최엄지가 수동적인 나쁜 년이라면,<지옥의 링>의 최엄지는 적극적인 나쁜 년입니다.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엄지는 언제나 '엄마'의 뒷편에 물러나 있습니다.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낸 마동탁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도 엄마의 극성이고, 오혜성과의 굳은 약속을 깨버릴 때도 엄마가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최후의 선택을 한 것은 그녀라는 사실입니다. 마동탁이 100게임 연속안타를 치건, 1000게임 연속안타를 치건, 그녀 자신이 버티고자 마음 먹었다면 버틸 수 없었을까요? 아니 최소한 마동탁만은 안 택해도 되지 않았을까요? 그토록 승리에 집착하는 야구선수와 결혼하지 않고, 그냥 평범한 누군가와 결혼해 살았더라면 오혜성의 남은 인생도 훨씬 더 나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녀는 오혜성이 떠나는 그 순간부터 그를 배반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겁니다. 이런 말하면 맞아죽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원래 여자는 그런 존재라고 (니체가) 그러더군요. (아, 요즘은 맞아죽진 않고 그냥 '여혐' 딱지를 붙이면 되는 건가)
어쨌든<공포의 외인구단>에서 엄지의 모든 선택의 전면에는 극성스러운 엄마가 있었습니다. 어린 혜성과의 연락을 끊어버린 것도 엄마이고, 오혜성과의 약속을 저버린 것도 엄마죠. 심지어 (제가 늘 의아하게 생각하는 부분인데) 오혜성은 외인구단 훈련을 떠나면서 받은 계약금 6천만원을 모조리 엄지에게 맡깁니다. (그 당시 6천만원이면 집이 한 채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아마 엄지는 그 돈을 엄마에게 맡겼겠죠. 그래서 혜성이 떠날 때 엄지 엄마가 친히 나오셔서 "미우나 고우나 자네는 내 사위될 사람이네"라고 말까지 해줍니다. 하지만 그 돈을 꿀꺽, 하는 데에도 아무 양심의 가책이 없죠.<공포의 외인구단>어디에도 혜성이 돌아온 후 그 돈을 마 서방(혹은 "탁이 씨"라고 부르는 걸 봐서 마동서방?)이 갚아줬다는 얘기는 없습니다. 하지만 보기 싫은 꼴은 나서기 좋아하는 엄마가 다 보여줍니다. 최엄지는 비극의 주인공마냥 절망한 표정을 보여주죠. (바로 다음 장에서 웨딩드레스를 입고 활짝 웃으면서!)
반면<지옥의 링>의 최엄지는 훨씬 더 솔직합니다. 고아원에서 혼자만 양녀로 들어간 엄지는 지긋지긋한 고아원 시절을 잊고 싶어서 양부모에게 서울로 이사가자고 졸라대고, 자기 뜻이 이뤄진 후에는 옛 친구들에게 집이 망했다고 거짓 편지까지 보냅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상류층에 편입해서 재벌가의 자제들을 노리죠.
"국민학교를 졸업할 무렵부터 난 내가 보육원 출신이란 사실을 지우고 싶어졌어.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난 친구들에게 철저하게 부모님의 친딸임을 강조했었지.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보육원에서 데려온 양녀란 사실이 친구들 사이에 알려지고 있었어. 그때부터 난 매일같이 울며 부모님을 졸라댔었지. 멀리 이사가자고. 멀리 멀리... 아주 멀리 이사가서 이후론 내가 보육원 출신인 걸 아는 사람은 내 눈앞에 얼씬거리지도 않게 해달라고 부탁했지."
"다시 생각해봐, 엄지. 넌 지금 뭔가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어. 어릴 때야 어린 마음에 창피하니까 그런 걸 감추려고 했다는 거 이해해. 하지만 이젠 다 자란 어른이야. 넌 아주 훌륭하게 자랐어. 그런데 이제 와서 출신을 갖고 부끄러워하고 감추려 한다는 건 이해할 수 없어. 진짜 부끄러운 건 그런 사실을 남에게 속이려고 하는 거야. 그리고 그것이 탄로날 게 두려워 어릴 적에 키워주신 원장 어머니께 안부 한 장 안 전한다는 사실이야."
"말소리 낮춰. 현재의 생활에 만족해 버린다면 나도 그럴 수 있어."
"난 벌써 과일가게를 개업했어. 비록 전세로 얻은 점포지만, 어쨌든 과일가게 주인은 나라고! 두산이도 함께 있어. 이제 너만 오면..."
"그러고 보니 어릴 적에 네가 그런 얘길 하곤 했었지... 장래소망이 과일가게 주인이라니... 내 꿈은 현재 사원 2백명의 아버지 회사를 내 힘으로 2천명, 2만명 한없이 늘려서 우리 회사도 기어코 재벌그룹 회사로 격상시키는 거야. 난 이미 보육원 출신 신분문제 따위로 고민하고 있지 않아. 까맣게 먼 옛날 일일 뿐이니까. 지금의 내 고민은 왜 마동탁 씬 한국에서도 손꼽히는 재벌그룹의 아들인데, 난 조그만 중소기업 사장의 딸일까, 하는 거야."
-<지옥의 링>1권, 혜성과 엄지의 대화.
6.
물론 시대적인 상황이 그렇다보니, 엄지가 CEO로 나서서 회사를 키우겠다는 건 아닙니다. 그저 저 당시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재벌집 아들과 결혼하는 일밖에 없죠. 그래도 엄지는 나름 두 명의 재벌집 아들과 혜성까지 세 명을, 요즘 말로 '어장관리'하며 농락합니다. 사실<지옥의 링>의 진정 한 주인공은 오혜성도 마동탁도 아닌, 최엄지라고 해도 무방해요. 오혜성, 마동탁, 그리고 또 다른 재벌가의 아들 최한수 세 명은 그저 최엄지의 손에 따라 움직이는 마리오네트죠. 그나마 셋 중에서 좀 헐거운 마리오네트가 오혜성입니다. 오혜성은 최엄지를 '타락'했다고 규정하고 다시 어린 시절의 최엄지로 돌려놓으려 합니다.
"서울로 간다. 엄지 아버지가 하는 회사와 똑같은 직종을 택해 다시 시작한다. 경쟁을 벌이겠어. 무너뜨리겠어. 그래서 엄지를 진짜 알거지로 만들어 버린다. 돈이 엄지를 변하게 한 거야. 돈만 없으면 엄지는 다시 옛날로 돌아와."
-<지옥의 링>1권, 혜성의 대사.
7.
앞서도 말했듯, 오혜성이 최엄지에 대해 갖고 있는 감정은 병든 집착이며, 그것은 '행복한 유년기'로 회귀하고자 하는 소년적 욕망의 발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엄지를 가지는것, 으로 구현되는데, 그 방식은<공포의 외인구단>과<지옥의 링>이 각각 다릅니다.<지옥의 링>에서는 엄지가 전면에 나서서 직접 욕망하고, 직접 대사합니다. 따라서 혜성의 목표도 '돈으로 엄지를 사는 것'이란 직접적인 것입니다. 그런데<공포의 외인구단>은 약간 르네 지라르 식입니다.
(물론 김민기가 의도하지는 않았겠습니다만) 엄지는 '엄마'를 전면에 내세워 자신의 욕망을, 엄마가 욕망하도록 합니다. 오혜성 역시 자신의 욕망 대신 엄지가 욕망하는 것, 야구선수가 되는 것, 그리고 마동탁(을 꺾는 것)을 욕망하는 것이죠.
이에 대해 얘기하는 건 꽤 재밌는 일이지만, 어쨌든 하고 싶은 얘기에서 너무 멀리 왔으니 되도 않느 욕망이론 놀이/라캉 놀이는 그만 하기로 하죠. 어쨌든 중요한 건, 엄지는 유년기에서 벗어나 여자가 되어가며 부와 안정, 그리고 허영을 욕망한다는 것이고, 오혜성은 성장하지 않고 끊임없이 유년기로 회귀하기를 바라며 그것을 엄지를 대상으로 구현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즉,
여자는 변하고, 소년은 성장하지 않는다
는 것인데,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게 바로 백두산과 오혜성의 대화입니다.
"...그렇게라도 마음을 잡아줬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말야... 너같은 생각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 세상에 너뿐만은 아냐. 그러나 그 사람들은 그러면서도 가정을 꾸민다. 다른 여자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을 하고, 그리고 아기를 낳고 행복하게 살면서 그런 생각을 조금씩 잊어간다. 그런데 문제는... 네 놈은 그럴 놈이 아니란 거다."
"물론이지."
"불행해진다."
(...)
"본인도 막을 수 없는 그 마음을 억지로 버리라곤 하지 않아! 다만 가정을 가지라는 거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잊어가는 거야. 자연스럽게.."
7.
혜성은 성장하지 않습니다. 사실 소년의 꿈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모두들 어느 정도 현실을 인정하고 사는 것인데, 혜성에겐 그런 감각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종 혜성의 정신은 현실을 이탈합니다. 어쩔 때는 엄지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잊고, 엄지의 동생인 현지를 엄지로 착각하기도 하죠. 그게 혜성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8.
그리고 우린 여태껏 한 명을 잊고 있었습니다. 마동탁입니다.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타자. 그리고 연습량과 집념에 있어서도 결코 뒤지지 않는 사나이. 신혼여행 중 에도 배트를 놓지 않는 성실함. 이기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사람.
마동탁이 혜성을 처음 만난 건 고교야구 대회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와 혜성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고등학교 대회에서 처음으로 마동탁에게 패배를 안겨준 게 혜성입니다. 마동탁은 자존심의 상처를 입었고, 그걸 다 잊을 때쯤 프로무대에서 다시 한 번 혜성에게 패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 단 한 번도 혜성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마동탁은 혜성이 자신을 포기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엄지를 인질로 삼아서 말이죠. 순진한 소년은 그를 이용하는 나쁜 년에게 집착하고, 그를 이용하는 나쁜 년은 권력과 돈을 가진 개새끼에게 자신을 바친다, 완벽한 먹이사슬입니다. 조금만 현실감 있게 바꿔본다면, 아르바이트 해서 좋아하는 여자애에게 명품백을 사주는 멍청한 남자와, 그 명품백을 매고 돈많은 남자를 낚으러 가는 여자, 그 여자를 멋진 외제차에 태워 호텔로 데려가는 돈많은 유부남 같은 관계인 거죠. 마동탁은 엄지를 인질로 잡은 것으로도 모자라서, 최후의 방법을 씁니다. 최엄지가 오혜성에게 "한 번만 져줘"라고 부탁을 한 것에는 분명 마동탁의 의도가 있었다고 이 작품은 밝히고 있습니다.
9.
그리고 최엄지가 오혜성에게 마지막 부탁을 하는 장면은 아주 상징적입니다. 최엄지는 오혜성을 고등학교 때 만났던 찻집, 그리고 처음 만났던 장소로 뺑뺑이를 돌리면서 오혜성의 소년시절로 시간을 돌립니다. 그리고 가장 순수했던 그 시절, 추억의 장소로 데려와서야 가슴에 담겨있던 부탁을 합니다. 한 번만 져달라고.
오혜성이 절망하는 것은 당연하죠. 오혜성이 달려왔던 길은 최엄지가 욕망했기 때문에 정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최엄지가 오혜성이 지기를 욕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순간, 오혜성에게는 여태껏 자신을 버티게 했던 삶의 의미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마지막 비극이 벌어지죠. 오혜성은 지기 위해 달려가면서 속으로 소리칩니다.
10.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놈!
네가 이겼어!
이까짓 승부가 무슨 소용이야!
엄지를 독차지 했다는 그것만으로...
네가 완전히 이긴 거야!
그래도 날 아주 잊진 마, 엄지.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 하던..
혜성이를...
11.
오혜성은 눈이 멀고, 최엄지는 미칩니다. 마동탁은 부인과 가정생활과 자존심을 바쳐서 1승을 얻습니다. 어느 누구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행복해질 가능성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이들의 잘못된 선택과 욕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비극이죠. 이게 바로 <공포의 외인구단>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80년대의 이 어이없고 촌스러운 비극은 우리가 달려온 역사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었습니다. 강해지겠다는 욕심 아래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미친 듯 질주했던, 그러나 자신의 것이 아닌 남의 욕망을 대신 욕망했던 민중 말이죠. 지금 생각해보면 이현세의 이 만화들처럼 참 촌스러운 일인데, 이 촌스러운 비극이 삼성동에서 요즘도 계속되고 있다고 하니 그 역시 신기한 일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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