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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책

살인자의 기억법 - 귀고리를 하고 시상대에 오른 남자의 최신작

by 이어원 2017.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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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서 김영하 작가의 '너의 목소리가 들려'를 다룬 것을 들었다. 김영하 작가가 직접 출연했었는데, 그곳에서 여전히 김영하 작가는 '처음 문학상을 받을 때 염색을 하고, 귀고리를 하고 시상대에 올라간 작가'로 이야기 되고 있었다. 더 재밌는 건, 2010년에 재정비해 출간된 김영하 작가의 데뷔작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의 알라딘 소갯글에도 똑같은 이야기가 있다는 점이다. 그 글에서 김영하는 '한국 문단 사상 처음으로 귀고리를 하고 문학상 시상대에 오른 남자'로 지칭되고 있었다. 

  물론 그가 데뷔하던 해가 1996년이었고, 그때는 문단 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렇게 보수적이던 시기였다. 소설가가 문제가 아니라 남자가수가 귀고리를 하고 무대에 올라도 방송금지를 먹던 시절이었으니, 김영하라는 작가의 등장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는 익히 짐작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그 충격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빼어난 데뷔작이 아닌, '시상대에 염색과 귀고리를 하고 올랐던' 사건으로 기억되는 것에 대해서 과연 김영하는 할 말이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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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하가 그 이후로 별달리 대표할 만한 소설이 없어서 아직도 '문학상 시상대에 귀고리를 하고 올라간 남자'라고 불린다면, 그에게는 조금 억울한 일이리라. 걸출한 데뷔작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이후로 김영하는 인상적인 소설들을 많이 썼다. 많지 않은 나이에 여러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고, 판매량도 본인이 '생각보단 많지 않다'라고 밝혔지만, 어쨌든 꾸준히 팔리고 있는 작가 중 한 명이고, 심지어 영화계에도 진출하여 흥행한 영화의 시나리오도 썼을 뿐더러, 본인의 팟캐스트도 진행하는, 다방면에서 다양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주목받고 있는 젊은 작가인데, 왜 아직도 김영하의 앞엔 '검은 꽃'의 김영하나 '빛의 제국'의 김영하나 '퀴즈쇼'의 김영하가 아니라 '귀고리를 하고 시상대에 올라간 작가'가 먼저 붙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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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하의 소설들은 - 소설적인 완성도와는 별개로 - 마치 김영하란 브랜드를 달고 나온 하나의 시리즈처럼 보인다. 김영하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지금 이 독자가 한국문단의 트렌드에 민감하다는 취향을 이야기 해주고, 동시에 쌔끈한 영문학 서적들처럼 스마트한 소설들을 좋아한다는 것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김영하의 '검은 꽃'은 초판본으로 겨우(?) 356페이지짜리 소설이다.참고로 '검은 꽃'은 애니깽으로 불리는 한국인들의 멕시코 이민사를 다루고 있다. 아마 조정래 같은 작가가 애니깽으로 비슷한 내용의 소설을 썼다면 최소한 5권 이상의 대하소설을 써냈을 것이다.  이 사건을 영화화한 김호선 감독의 애니깽은 1997년에 완성된 영화였는데, 러닝타임이 무려 130분이었다. 당시 한국영화의 상영시간은 대체적으로 100분에서 120분 사이였으며, 특히 120분을 넘지 않는 것은 불문율에 가까웠는데 애니깽은 다루고자 하는 소재가 너무 무겁고 커서 길어지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참고로 같은 해 개봉한 비트는 113분, 초록물고기는 114분, 넘버3는 109분, 편지는 102분, 접속은 각각 106분이었다. 그러나 김영하는 이 길고 무거운 이야기를 356페이지에 압축했는데, 반면 PC통신 세대의 연애담이라 할 수 있는 '퀴즈쇼'의 초판본은 무려 463페이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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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거운 소재는 분량이 많아야 하고, 가벼운 소재는 분량이 적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김영하라는 작가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데 재밌는 힌트를 준다. 김영하라는 작가의 등장 이후, 한국 문단의 젊은 작가들은 사회보다는 개인의 이야기를, 개인의 입장에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많은 소설들이 3인칭보다는 1인칭을 사용했으며, 사건의 서사보다는 개인의 감정과 정서 변화를 중심으로 페이지를 채워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검은 꽃'처럼 거대한 사건들이 벌어지는 소설이, 오히려 90년대 PC통신 세대를 관통하는 추억담 보다 더 적은 분량으로 끝맺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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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하의 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러한 특성들에서 보이는 일종의 문학적 댄디즘이다. 그의 소설은 역사를 태백산맥처럼 구질구질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현실의 벽도 처연하게 그리지 않는다. 그가 직접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서 '어두운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다뤄보고 싶었다'라고 밝힌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델리스파이스의 '챠우챠우' 가사에서 제목을 차용했다. 이것을 보고 그의 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느끼는 문학적 댄디즘과, 인디 음악을 향유하는 계층이 느끼는 일종의 댄디즘이 연결되어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는 '현실'이라는 세계에 들어가서 리얼하게 표현하고 싶었다고 하지만,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시점이 이동하는 것은 물론이고, 의도적으로 성경의 복음서의 구성을 차용하고 있기도 하며, 독특하게 에필로그를 40페이지 정도나 길게 가져가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여러 문학적인 시도들로 그 리얼함을 상쇄시키고 있다. 그는 '빨간 책방'에서 '작가들이 점점 더 부르주아 화(化) 되어 가고 있으며, 문학 역시 그것을 향유하는 계층에 맞춰 중산층의 전유물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우려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어두운 이야기를 다루면서 그 중산층들이 감당하지 못할 현실에 대해서는 필터링하고, 동시에 문학적인 시도들로 그들이 받아들이지 못할 부분들에 대해서 일종의 조미료를 친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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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살인자의 기억법'으로 넘어가자. 이것은 더 어두운 이야기이다. 하지만 김영하는 사이코패스 살인자를 다루면서도 기시 유스케처럼 어둠의 극한으로 내려가지 않는다. 누가 보아도 아멜리 노통의 소설을 연상시키는 제목을 뽑은 것부터, 역시 그는 또 한 번 그의 문학적 댄디즘을 확인시켜준다. 생각보다 얇은 책의 두께로 보면 알겠지만, 채 200페이지가 되지 않는 아주 짧은 소설인데, 그 분량과는 상관없이 꽤 어둡고 강한 이야기다. 하지만 동시에 김영하 식 조미료가 여기저기 쳐져 있어, 심성이 약한 책을 사랑하는 여성독자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연쇄살인범에 대한 소설이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소설은 참 영리하게 잘 썼다는 생각이 든다. 1인칭 독백체의 짧은 문장으로 멈출 틈 없이 달려나가니, 200페이지가 되지 않는 소설을 끝까지 읽는 것에 채 3시간이 걸리지 않으며, 그 안의 내용들도 흥미진진하다. 꽤 강한 내용의 살인사건들이 소설 안에 있지만,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 장면이나 정신적으로 데미지를 주는 장면은 없다. 몇 번 안타까운 감정이 들긴 하지만, 결국 결말에 이르면 그 모든 것을 예술적인 모호함 안에서 정리하고 깔끔하게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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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보아도 참으로 '김영하다운' 소설이라 하겠다. 좋은 재능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성실하게 자신의 작품으로 만든 것도 사실이다. 자신의 이름값에 걸맞게 어느 정도 이상의 퀄리티의 소설을 꾸준히 뽑아내 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살인자의 기억법' 역시 그런 범주에 충분히 들어갈만한 작품인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댄디한 문학가에게, '그래도 그 이상의 뭔가, 좀 세련되지 못하더라도 걸죽한 것'을 뽑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독자의 촌스러운 욕심일까? 어쨌든 다음 작품이 나올 때도 김영하는 '살인자의 기억법'의 김영하가 아니라 그냥 '문단 사상 최초로 귀고리를 하고 시상대에 올라간 작가'일 것 같다. 물론 그게 임팩트가 강한 사건이긴 했겠지만, 그래도 그것보다 임팩트가 강한 소설이 하나 쯤 있다면 더 괜찮은 커리어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