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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사람들

신해철 – 말년末年의 양식樣式에 관하여

by 이어원 2017. 3. 5.



2014.10.27에 썼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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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해보면 딱히 별다른 인연이 있는 사람도 아닌데, 무척 깊은 사이처럼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살면서 무대 먼 발치에서 마주친 기억 밖에 없는데, 내 삶에서 꽤 중요한 사람처럼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내게 신해철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를 처음 본 건 대중목욕탕의 대기실에 있는 작은 브라운관 TV속에서였다. 대학가요제의 무대에서, 피부가 하얀, 잠자리 안경을 끼고 셔츠를 입은 청년 한 명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청년은 목욕을 끝나고 나올 때까지 계속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 청년이 이끄는 팀이 대상을 탔고, 목욕을 끝내고 나왔을 때 부르던 노래는 그 앵콜이었다. 나는 그 당시 그 청년의 이름을 몰랐고, ‘무한궤도’라는 팀의 이름만 기억에 담아두었다.


그때 나는 가요를 듣지 않던 시기였으므로, 그로부터 한참 동안 나는 그를 잊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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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몇 년 후, 뒤늦은 소년의 사춘기가 시작되고 나는 유행가라는 것을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텔레비전의 가요 프로그램에서 낯익은 청년이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라는 발라드 곡으로 1위를 하는 것을 보았다. 그때 그의 이름을 처음 알았다. 신해철이었다. 어디선가 본 얼굴이라 신문과 잡지를 뒤져보고 – 안타깝게도 그땐 네이버 검색이 없었다 – 그가 그때 목욕탕에서 봤던 그 얼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딱히 별다른 인연도 아니었는데, 그냥 그게 특별했다. 그때 목욕탕에서 봤던 그 어려 보이던 대학생이 어느새 가요 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하는 가수가 되었다는 것이.


같은 해, 학교에서 수학여행을 갔고 장기자랑 시간이 있었다. 여자애들에게 인기가 많던 한 남자아이가 – 물론 나는 아니었다 – 나와서 테이프를 틀고 노래를 불렀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노래였는데, 노래 중간에 갑자기 영어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어린 마음에 그게 그렇게 멋있어 보였던 것 같다. 아마 나만 그렇게 느낀 건 아니었을 것이다. 그 노래도 그때 그 청년이 부른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가슴 속 깊이 무언가 뿌듯함을 느꼈다. 시작부터 지켜본 한 명의 가수가 스타가 되었음을 확인했던 것이다. 그는 노래를 폼나게 만들고 부를 줄 알았고, 사춘기의 우리들은 그처럼 되고 싶었다. 그때부터 우린 앞머리의 한쪽 끝을 내리기 시작했고, 연습장에 한글로 그 중얼거림을 베껴 적고 연습했다. 우리들의 사춘기도, 90년대도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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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중학교 때, 그는 밴드를 만들었다. 처음엔 ‘내가 너의 기사가 되어 너를 지켜 줄 거야’라며 발라드를 부르더니, 그 담에는 전자음과 함께 ‘아침엔 우유 한 잔, 점심엔 패스트푸드’라고 랩을 했다. 그의 저음과 세련된 감각은 90년대의 청춘에게는 처음 보는 신세계 같았다. 자율학습 시간에 몰래 듣던 라디오에서 그는 현학적인 말투로 우리를 사로잡았고, 심지어 그는 우리가 가고 싶었던 좋은 대학을 다니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항상 우리 편이었다. 넥스트의 2집은 프로그레시브 메탈과 하드락 등 다양한 락을 시도했지만, 동시에

 

  부모가 정해놓은 길을
  선생이 가르치는 대로
  친구들과 경쟁하며 걷는다


  라고 우리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노래해주었다. 그는 스타였고, 아이돌이었으며, 뮤지션이었지만, 동시에 우리 편을 들어주는 형, 그것도 실력 있고, 잘 생기고, 말도 잘하며, 말도 잘 통하는 형이었다. 나는 그의 음악을 듣는 것만큼 이야기를 듣는 것 또한 좋아했다. 말을 잘하기 위해서 그가 진행하는 라디오를 녹음해서 들으며 연습했다. 그의 노래와 라디오를 들으며 나는 공부를 해서 대학에 갔다. 내가 대학에 가던 해에 넥스트는 마지막 앨범을 냈고, 그해 말 그는 내 학창시절과 함께 했던 음악을 만들었던 그 팀의 해산을 발표했다.
  

그는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전자음악을 공부하며 ‘Crom’s Techno works’와 ‘Monocrom’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미 가요계는 댄스음악과 아이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와 나의 90년대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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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목욕탕의 브라운관 TV에서 보았던 하얀 피부의 소년은 나이를 먹었다. 세상의 법칙이 그러하듯 나도 나이를 먹었다. 그는 비트겐슈타인이라는 밴드를 결성해서 활동하기도 했고, 넥스트를 다시 결성하기도 했지만, 음악도 인기도 예전 같지는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 나는 군대를 갔다 오고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했다. 나도 예전만큼 그의 음악을 즐겨 듣진 않았고, 듣더라도 새로 나온 앨범을 듣기보다는 예전의 노래들을 더 많이 들었다. 나에게 신해철은 ‘그대에게’와 ‘The Dreamer’와 ‘Money’를 만든 사람이었지, ‘오버액션맨’이나 ‘Growing up’을 부른 가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끊임없이 음악을 만들었고, 계속해서 이러저러한 쟁점들에 자신을 노출시키기도 했다. 그는 여전히 내 편을 들어주는 ‘말 잘하는 형’이었다. 예전보다 조금은 때묻고 세상과의 싸움에 지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자신, 또 세상과 싸우며 내가 생각하는 가치를 함께 추구해주는 형. 그리고 나는 항상 머리에서 빙빙 돌기만 하던 말을 명쾌하게 정리해주던 형. 저 형처럼 치열하게 나이 먹고, 저 형처럼 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형. 그렇지만 타협하는 내 모습에 늘 나를 미안하고 부끄럽게 만드는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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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는 베토벤의 후기 주요 작품을 해명하고 옹호하면서 ‘말년의 양식’(Late Style) 혹은 ‘말년성’이란 개념을 만들었다. 그리고 에드워드 사이드는 이것을 확대시켜 이렇게 이야기했다; 흔히 예술계의 원로들은 후반기에 이르러 사회 저명인사 노릇이나 하고 스승이니 대가니 하면서 조화, 소통, 해결 등의 근사한 말들을 한다. 그것은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적 모순이나 예술의 허위성 위에 엉덩이를 비비고 앉아서 거들먹거리는 행동이다. 이는 거의 졸렬한 상태일 뿐이다. 다음으로 상상 가능한 풍경은 진실로 원로급 대가 혹은 대가급 원로가 삶의 마지막 시기에 이르러 진정한 내적 통합의 작품에 몰두하는 것이다. 이 진실한 풍경을 사이드는 호의적으로 기록한다. 그는 ‘공인된 경륜과 지혜’, ‘특별한 성숙’, ‘화해와 평온함의 기운’으로 충만한 이 풍경에 렘브란트, 마티스, 바흐, 바그너 등을 존엄하게 안치한다. 그러나 사이드가 옹호하는 것은 제일 마지막 ‘말년의 양식’이다. 최후의 순간에 이를 때까지 자기 삶의 모순을 응시하고 타협할 수 있는 세상의 허위와 긴장하는 바로 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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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그의 인터뷰집에서 그는 ‘지미 헨드릭스나 커트 코베인, 리버 피닉스처럼 다 태워버리고 20대 후반에 휙- 하고 가버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도 멋있게 살고 있는 뮤지션들이 더 멋진 것 같다’라고 고백한 것을 읽은 적이 있다. 그리고 그는 몇 번의 실망스런 결과물을 내놓으면서도, 끝까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말년성을 지켜가려고 노력했었던 것 같다. 그는 40대 중반까지 락커였으며, 장난 삼아 ‘마왕’이라 불리며 흉내를 내는 악동이었고, 동시에 사회적으로 발언하는 아티스트였으며, 그것을 아내를 사랑하는 가장과 한 아이의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과 양립시킬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면 어쩌면 그는 우리 세대가 꿈꾸었던 모습을 항상 앞장 서서 만들어 가는 일종의 롤모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면 나는 항상 10년 후의 내 모습이 지금의 그처럼 되기를 바랐던 것 같다. 10대의 나는 20대에 그처럼 좋은 대학을 나온, 말 잘하는 락스타가 되고 싶었다(물론 그렇게 되진 못했다), 20대의 나는 30대의 그처럼 자신의 분야에서 실력으로 인정받고, 그 실력 때문에 세상의 편견과 질서, 담합에 저항할 수 있는 자가 되기를 바랐다(물론 그렇게도 못 되었다). 나는 그보다 12년 늦게 결혼했고, 그처럼 밖에선 프로페셔널하면서 안에서는 푼수처럼 아내에게 애교를 떨 수 있는 남편이 되기를 바랐다(이건 그래도 얼추 비슷하..지 않을까?) 그리고 지금 내 아내는 첫번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고, 나도 그처럼 좋은 아빠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그는,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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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죽음에 우리가 이토록 크게 충격을 받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테지만, 하나는 진정으로 우리 세대의 성장과 함께 자라난 한 명의 거대한 스타가 이 세상을 떠났다는 점, 그리고 동시에 그것이 어이없을 정도의 허망한 죽음이었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그는 아직 한창 활동할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겨우 나보다 10살이 더 많은 사람이다. 10년 후의 나 역시 한창 일할 나이일 것이다. 그렇지만 점점 더 힘겨워지는 이 세상의 많은 가장이 40대에 그렇게 사라져간다. 아직 더 많이 사랑해줘야 할 아내와 아이들을 이 세상에 버려두고.


수컷들이란 절반의 허세

그리고 절반의 컴플렉스로 이루어져있다

배를 잔뜩 부풀린 복어의 낯짝이

사실은 새파랗게 겁에 질려있는것처럼
웃기는 건 섹스할때도 무능력 해보일까봐

초조해하는 의외의 소심함이지만
웃기지도 않은건 그러구 난 뒤에

허탈해하고 고독해하는 의외의 예민함이다

그러니 허세의 대가란게 꽤나 비싸다

약한 척도 안되고 변명도 않되고

남자답게 사내답게라는

그 말 안에 스스로 고립된다

대통령이야 과학자야 하던 꿈은 의외로 빨리 사그러진다

그 빈자리에 밤마다 술을 들이 붓고

나이 사십에 간암으로 갈때까지
마누라와 새끼들을 위해 일하고 일하고 일한다

              

-       비트겐슈타인, ‘수컷의 몰락’ Part 1


그처럼 살고 싶었으나, 그처럼 살지 못했던 우리들은 어쩌면, 그만은 자신의 ‘말년의 양식’을 완성시켜주길 간절히 바랐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이렇게 타협하고 포기하며 살아가지만 그만은 끝없이 철없는 악동으로 남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음악과 예술로 싸워주기를, 그리고 변함없이 말 잘하는 형으로 우리의 편이 되어주기를 바랐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좋은 아빠와 남편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해주기를 원했는지도. 나는 못했지만 해철이 형은 할 수 있을 거라고. 여태껏 해철이 형은 그렇게 해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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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마왕도 결국은 해내지 못했고, 그의 기일은 내 생일 3일 후가 되었다. 역시 생각해보면 별 것 아닌 인연이지만, 그런 이유로 나는 그의 기일을 평생 기억할 것이다. 그는 우리가 억지로라도 그럴 인연을 만들어 기억할 이유가 충분한 사람이니까.


엊그제는 어머니께서 ‘신해철이 그렇게 되어서 너 어떡하니?’라고 전화를 다 주셨다. 오늘은 아내가 그의 부고를 전하는 내게 ‘괜찮냐?’고 특별히 물어 보았다. 따지고 보면 살면서 말 한 마디 섞은 사람도 아닌데, 그의 죽음이 왜 내게 그만큼 큰 충격일 거냐고 묻는 것일까, 궁금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들이 그렇게 물을 만큼, 내 삶과 감수성의 많은 부분들이 그에게서 왔음을 깨닫는다.


하늘 위에서도 치열하게 ‘말년의 양식’을 완성하고 있으리라고 마무리 하기엔 그가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그는 ‘사라져가야 한다면 사라질 뿐, 두려움 없이’라고 노래한 사람이니까. 다만 마지막으로 그 가는 길에 그의 노래 한 곡을 골라야 할 것 같은데, 무엇을 골라야 할지 고민하다가, 이 노래를 골랐다. 그가 다른 사람의 추모곡으로 만든 노래이지만, 사실은 그 역시 우리 시대와의 Mr. trouble이 아니었을까. 그래, 형, 잘 가. 그동안 고마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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