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년 3월 11일, 그러니까 아직 <도깨비>가 방영되기 전,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이 벌어질 무렵에 썼던 글입니다. <도깨비> 이후 김은숙 작가에 대한 생각은 꽤 많이 바뀌었음을 밝혀둡니다.
1.
김은숙 드라마엔 내가 싫어하는 거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데 - 재벌, 러브라인에 모든 것을 올인한 플롯, 억지로 짜내는 명대사와 유행어 등등... 심지어 김은숙 본인도 '온에어'에서 스스로 깠던 적이 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김은숙 드라마를 즐겨보는 편이다(를 넘어서서 한때 미친 듯 찾아봤었다)
2.
<상속자들>은 어쩌다보니 걸렀고, <태양의 후예>의 기획 - 가상의 국가 우르크에 파병된 남녀의 사랑 이야기 - 을 처음 봤을 때 '이제 김은숙도 슬슬 끝물이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한국 드라마를 끊은지 오래라 보고 있진 않은데 주변 반응이 '송중기는 이미 신드롬 수준'이고 '별그대 김수현보다도 센 것 같다'라는 평까지 나온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사실 김은숙의 작법은 오묘하다. 현존하는 작가들 가운데 거의 유일무이하게 회별 시놉이 없이 제작과 투자가 결정되는 작가라고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 회별 시놉을 쓰지 않는 걸로 알고 있다. 안 믿을 수 없는 게, '시크릿가든'의 경우 작가가 지켜야 하는 플롯의 흐름을 모두 어긴 드라마다. 메인 콘셉트는 '하지원과 현빈의 몸이 바뀌면서 일어나는 소동'인데, 20부작 드라마에서 이 사건이 일어나는 게 7부 마지막 장면이다. 그리고 그전까지 전혀 아무런 복선도 없이 현빈과 하지원이 티격태격하다가 뜬금없이 몸이 바뀌어 버린다. 나는 <시크릿 가든>이 한참 재밌던 초반부에 기획을 보고, '도대체 몸이 언제 바뀌는 거야!'라고 무척 궁금했는데, 그 이후에도 한참동안 전혀 언급조차 없어서 의아했던 기억이 있다. 전형적인 플롯에 따르면 적어도 몸이 바뀌는 장면은 3부 이내 - 사실 이것도 늦다 - 에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아무도 뭐라 하지 못했겠지. 사실 몸이 바뀌기 전의 드라마도 엄청나게 재밌었고, 시청률도 쭉쭉 올라가고 있었으니까. 실제로 몸이 바뀌는 것은 스토리 상에서 별로 중요한 역할을 하지도 못했다. 그냥 현빈과 하지원이 티격태격하는 장면인데, 그것은 원래 몸에 있었어도 비슷하게 재밌었으리라.
3.
또 하나 김은숙 드라마의 오묘한 점은, 로맨틱 코미디임에도 불구하고 감정이 어느 순간 확 넘어가버린다는 점이다. 중간에 쌓으면서 천천히 변해가지 않는다. 서브 남자주인공은 거의 한 순간에 여자주인공에게 반하고, 메인 남자주인공은 싸우다 보면 어느새 그녀를 갈망하고 있다. 보통 정석에 따르면 다툼과 만남이 연애감정으로 변하는 순간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다. 그냥 만나고 마주치다 보면, 어느새 그는 그녀의 포로, 라는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는데... 문제는 빠른 전개와 재밌는 장면들로 채워져서 시청자들도 같이 넘어가버린다. 이건 굉장히 특이한 문제인데, 아마 대부분의 시청자들이 어느 순간 "쟤들은 언제 사귀나"하고 그 둘이 이루어지는 걸 당연시하게 되기 때문에, 그 착각을 이용한 트릭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정작 드라마의 플롯을 가만히 분석해보면, 그 둘 중에 누구도 연애감정으로 변하게 되는 결정화의 순간은 없었다.
4.
알파고의 바둑을 보며, 문득 김은숙의 드라마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김은숙의 드라마는 플롯을 시간의 경과에 따라 짜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간순서에 따른 회별 시놉은 의미가 없다. 다만 그 순간 순간 가장 재밌는 장면들을 끼워맞추면서 그 장면을 채워 하나의 스토리를 만들어 내고, 한 회 한 회를 흐름에 따라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위에 높이 쌓아올리는 식이다.
5.
인간 기사는 바둑을 하나의 단선적인 흐름으로 인식한다고 한다. 선수는 후수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후반부에 미칠 영향을 앞에서 계산해 가면서 지금의 수를 두는 것이다. 하지만 알파고는 무한연산을 통해 각각의 수를 평행우주처럼 공간적으로 쌓아올린다고 한다. 즉 시간적인 흐름과는 상관없이 지금 이 순간에서 최적의 수를 둘 뿐인데, 이것이 인간의 방식과는 달라서 인간은 이것을 '실수'처럼 보일 뿐이다. 인간은 과거의 수에 얽매이는데, 알파고는 그 점에서 자유롭다. 과거의 의지를 갖고 둔 수는 끈질기게 남아 인간의 무의식 속에서 인간을 이끌어 나간다. 하지만 알파고는 한 수가 끝나면 다시 리프레시하고 다음판에 최적의 수를 찾는다. 진짜 오묘한 점은 그렇게 평면을 공간적으로 쌓아올린 최적의 수들이 모이면 어느새 - 본인이 의지하지 않은 -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 놓아 그것이 승리로 이끌어 나간다는 것이다.
마치 김은숙의 드라마처럼.
6.
그리하여 나는 문득, 내가 혹시라도 <10asia> 같은 곳에 글을 팔아먹는 사람이라면, 이 시점 쯤에는 '김은숙과 알파고'라는 제목으로 글을 팔아먹을 수 있는 감각 쯤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고.
...그냥 이런 글을 끄적이게 되었다.
'REVIEW >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준 - 소년이여, 신화가 되던지. (2) | 2017.03.06 |
---|---|
신해철 – 말년末年의 양식樣式에 관하여 (2) | 2017.03.05 |